우리집에 왜 왔니 / 이시하
어둠을 파고 시궁쥐 눈깔 같은 봉숭아 씨앗을 심을래요 모르는 집 창문에 애절히 피워나 모르는
그들을 울게 할래요 봉숭앗빛 뺨을 가진 어린 손톱에 고운 핏물을 묻힐래요.
우리 집에 왜왔니 왜왔니 왜왔니
꽃 찾으러 왔단다 왔단다 왔단다
서둘러야 해요 나를 통과해 가는 그대의 눈을 볼래요 너무 오래 견딘 상처는 아물지 않아요 몹시 처량해진 나는 모르는 집 창문 밑에서 울 거예요 당신을 부르며 울 때 사람들은 어두워져요
문이 닫혀요
이렇게 부질없는 이야기는 처음 해봐요 나는 늘 술래이고 아직 아무도 찾지 못해요 가위바위보가 문제에요 나는 주먹만 쥐고 있거든요 아무도 내게 악수하는 법을 가르쳐주지 않아요 당신도 곧잘 숨는다는 걸 알아요 이제는 내가 숨을래요 꽃 피지 않는 계절에 오래도록 갇혀있을 거예요
우리 집에 왜왔니 왜왔니 왜왔니
꽃 찾으러 왔단다 왔단다 왔단다
봉숭아꽃이 만발했어요 보세요 정말 내가 모르는 집이에요 창문 밑에 피어난 저 붉은 봉숭아! 무슨 꽃은 봉숭아꽃이어야 해요 당신은 봉숭아꽃을 찾으러 온 거예요 나는, 나는 꽃 피지 않을 거예요.
아무도 찾지 못해요 문은 열리지 않아요
[당선소감] “담담하게 아스러지는 물처럼 시 쓰고 싶어
“정지용 시인의 시는 서정적이면서도 따뜻하잖아요. 온기가 훈훈하게 느껴지는 시들이라 제 시하고는 많이 다르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많이 기대를 안 했거든요. 그런데, 이렇게 큰 시인의 상을 받게 되니 큰 영광이에요.”
제12회 지용신인문학상 당선자로 이향미(39, 경기도 의정부시 신곡2동)씨가 선정됐다. 당선작은 시 `우리집에 왜 왔니'.
이 씨가 시를 쓰기 시작한 것은 3년 전부터였다. 주부로서의 삶에 대한 회의와 자아 정체성에 대한 의문이 자신의 젊은 시절을 돌아보게 했고 그것이 글을 쓰는 계기가 됐다.
이 씨는 고등학교도 갈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하고 어려웠던 시절을 보냈다. 산업체 고등학교에 들어갔지만 몸이 아파 중도에 학교를 그만뒀고 우여곡절 끝에 남들보다 2년 늦게 인문계인 철원여고에 들어가게 됐다. 그 시절에는 그저 감수성 풍부한 여고생들이 흔히 그러하듯 시를 끄적여 보았을 뿐 시인이란 직업은 감히 꿈꿔볼 수 없는 머나먼 동경의 대상이었다.
어려웠던 시절 농촌은 동생, 어머니, 아버지를 잇달아 여읜 이 씨의 아픔을 따뜻하게 보듬어주는 대지였다. 아직도 이 씨는 슬픔이나 가난 따위를 잊었던 젊은 날의 기억들에서 많은 영감을 얻고 있다고 한다.
“옛날 `아이 데려가기' 구전설화에서 상상력을 덧보태 창작한 시예요. 구전설화에 보면 옛날에는 가난한 집에서 딸아이를 팔기도 했다고 하더라구요. `꽃 찾으러 왔단다'의 꽃이 `딸아이'를 상징하는 것이에요. 사람들이 이 시를 보고 슬프다고 많이 해요.” 이향미 씨는 그 딸아이의 심정으로 시를 썼다고 했다.
철도 종단점이고, 군부대가 많이 위치한 강원도 연천군 신서면 신탄리가 고향인 이향미씨는 학창시절부터 어려운 가정환경에서 힘들게 자라났다. 심사위원을 맡은 유종호 문학평론가와 신경림 시인은 이향미씨의 시에 대해 “작품들이 섬세하면서도 경묘하고, 신선하다”며 “소재처리나 언어 수사의 상투성을 피하고, 작품에 여백을 두고, 여운을 남겨줘 더 돋보였다”고 평가했다.
이향미씨는 “초등학생 딸 채림이가 어릴적 뇌진탕 휴유증으로 기억력 장애가 있어 딸을 돌보면서 글을 많이 썼다”며 “결혼 이후 시를 쓰지 못하다가 최근 3년 동안 시를 쓰도록 적극 지원한 가족에게 감사하다”고 말했다.
[심사평]
예년과 같이 많은 작품이 전국 방방곡곡에서, 심지어 해외에서까지 날아들었다.
응모한 253명이 보여준 1604편의 작품을 읽었다. 대개 상당한 습작기를 거쳐 일정 수준의 솜씨를 보여주고 있는 작품들이다. 그만큼 고르기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엇비슷한 언어구사와 소재 처리가 두드러져 규격화된 유행이 퍼져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개성적인 소재 처리와 말솜씨가 뚜렷한 작품을 찾으려 노력하였다. 그러나 개성을 드러내려고 작위적으로 ‘튀는’것은 눈에 거스르는 일이요 하나의 취약점이다. 또 산문과 시의 차이를 고려하지 않고 무작정 길어지고 장황해지는 경향도 소망스러운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자기다운 시선과 목소리가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여러 응모자들의 자성과 배가되는 노력을 요청한다.
‘집 나간 비둘기를 찾습니다’(최종길)는 순진한 발상이고 어사 선택도 아주 소박하다. 그래서 허를 찌르는 독특한 매력을 발산한다. 상투성에 물들지 않은 것이 큰 장점이다. 그러나 나머지 작품들이 허약해 새 얼굴로 나서기에는 미흡하였다. ‘인사’, ‘꽃잎’, ‘문래동 4가 8번지’(안경숙) 등 다섯 편도 독자적인 목소리를 보여주고 있다. 산문화 성향을 억제하고 소재의 경제적인 처리를 지향하고 있는 것도 아주 든든하게 생각된다. 또 다루고 있는 소재도 다채로운 편이어서 믿음직스럽다. 그러나 대체로 소품이어서 매우 아쉽지만 이번엔 더 정련할 시간을 주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우리 집에 왜 왔니?’, ‘꽃놀이 꽃놀이’등 다섯 편을 보여준 이향미 씨의 작품들은 섬세하면서도 경묘하고 신선하다. 그리고 소재처리나 언어 수사의 상투성을 피하고 있음도 잘 드러나고 있다. 또 시와 산문의 차이라는 것도 잘 분간하고 있어 믿음직스럽다. 작품에 여백을 두고 여운을 남겨주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 집에 왜 왔니’를 당선작으로 뽑았다. 당선을 축하하며 앞으로 자기 목소리가 더욱 뚜렷한 시인으로 성장하기를 기대한다.
심사위원 신경림 시인, 유종호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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