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직 낙산사에 가지 못한다 / 정호승
나는 아직 낙산사에 가지 못한다
낙산사에 버리고 온 나를 찾아가지 못한다
의상대 붉은 기둥에 기대 울다가
비틀비틀 푸른 수평선 위로 걸어가던 나를
슬그머니 담배꽁초처럼 버리고 온 뒤
아직 나를 용서하지 못하는 나를 용서하지 못한다
이제는 봄이 와도 내 손에 풀들이 자라지 않아
머리에 새들도 집을 짓지 않아
그 누구에게도 온전한 기쁨을 드리지 못하고
나를 기다리는 나를 만나러 가는 길을 이미 잊은 지 오래
동해에서는 물고기들끼리 서로 부딪치지 않고
별들도 떼지어 움직이면서 서로 부딪치지 않는데
나는 나를 만나기만 하면 서로 부딪쳐
아직 낙산사에 가지 못한다
낙산사 종소리도 듣지 못한다
[심사평] ‘자아 상실의 깊은 성찰’ 공초의 무소유 삶과 상통
우리 현대시의 새벽을 사자후로 활짝 연 공초 오상순 선생을 기려 제정된 제19회 공초문학상 수상자로 정호승 시인이 선정되었다. 수상작 ‘나는 아직 낙산사에 가지 못한다’가 내포한 자아 상실의 깊은 성찰이 동해의 드넓은 공간과 천년고찰 낙산사의 종소리 여운에 담아 웅장한 원음(圓音)으로 파장을 일으킨다.
올해로 시력 40년을 맞는 정호승 시인은 등단 이후 꾸준히 그리고 왕성하게 창작을 해 오며 독창적 시 세계를 열어 왔을 뿐 아니라 특히 감도가 깊은 시로써 오늘의 한국시 위상을 한 단계 높여 온 시인이다.
‘비틀비틀 푸른 수평선 위로 걸어가던 나를 / 슬그머니 담배꽁초처럼 버리고 온 뒤/ 아직 나를 용서하지 못하는 나를 용서하지 못한다’에서 저 공초가 일찍이 꺼내 들었던 ‘허무혼의 선언’이나 ‘방랑의 마음’에 어찌 그리도 맞닿아 있는 것인지 아무것도 가지지 않음으로 얻는 것, 그리고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 이루어 내는 것을 실현하고자 했던 공초의 정신이 예순여섯 해 뒤에 태어난 정호승 시인의 뇌파에서 자장을 일으켜 더도 덜도 깎고 보탤 것 없는 완성품으로 되살아난 것 같아 저절로 탄성이 나온다. 끝으로 수상작은 정호승 시집 ‘밥값’에서 가려냈음을 밝힌다.
- 심사위원 이근배·임헌영·이성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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