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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로역정, 혹은 / 김정웅
지난 날 내 그대를
자욱한 눈물 없이 사랑함은
거처 없이 떠돌던 내 가난한 영혼이
살[肉]을 빌어서 그런 저런
세(貰)들어 살던 집들같이
땀냄새 진한 까닭일지나 이제, 내 사랑은
겨드랑이 가볍고
살을 버려서 살을 얻음 같음이니
그 사이
모나고 답답했던 단칸방을 벗어나
욕심줄인 은단(銀丹)알 같은 집 한 채 찾아
아담히 홀로 먼저 이사함 같음이니
그곳, 푸르고 단단한
둥근 청기와가 없는 담장 너머
아직 싹트지 않은 별들이
까마득히 박혀 숨쉬는 그런 곳
그대여,
내 나가는 곳 지금은 모를지나
어린 날, 수학여행 떠나기 전날 그 신새벽처럼
그렇게 뜬 눈으로 가슴 설레이게 하는 곳,
유성(流星)이 옛 할아버지 흰 턱수염처럼
바람 없이도 이따금 길게 흩날리는
잊혔던 고향 동구(洞口) 밖 아득한 천공(天空),
기쁜 그곳, 너희들과 영 이별이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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