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수상] 파리 / 김오늘
그냥 천장에 거꾸로 붙어 서서
조용히 손이나 비비고 있었더라면
간당거리는 파리 목숨
며칠 연장했을는지 모른다
초대장도 없이
파리는 파티복도 입지 않고
맨 손에 두 폭 망토 휘날리며
감히 천장의 샹들리에 찝쩍거렸다
어설픈 춤사위 부추기며
하얗게 흐르는 시나위 장단
이왕 무대에 올랐으니
등 떠민 적 없는 바람에게도 인사하고
가지지 않은 명주 수건 탓도 하면서
모서리의 살풀이 한 판 끝내주는 순간,
느닷없이 후려치는 신문의 몽둥이 한 방
나동그라지는 숯검댕이 무희
제 피로 무대에서 부고장을 쓰게 될 줄 몰랐다
사건 사고의 침엽수림 광고란에
붉은 꽃상여가 놓였다
이만한 죽음이면
평생 손 비벼 기도한 보람은 있는 것이다
[심사평]
본심에 올라온 24명의 작품 가운데 박형권의 「현고수」와 김오늘의 「파리」를 최종심에 올렸다. 두 작품은 어느 것을 대상작으로 정해도 좋을 만큼 작품의 완성도나 성취도가 엇비슷했다. 「현고수」는 화자의 내면적 표출 방법의 하나로 마스크를 쓰고 이를 작품의 주제 구현에 활용하는 솜씨가 돋보이고, 「파리」는 시어의 정서적 기능을 활용하여 화자의 감정이나 태도를 분명하게 드러내는 기량이 돋보인다.
나는 북을 걸어둔 느티나무다.
몇 발자국 뒤의 생가에서 나와 둥두둥! 북을 두드리는
마흔 살 선비다.
그 선비의 붉은 철릭이어서 뿌듯하다
육백 년을 살았어도 불혹의 깊은 속을 다 읽지는 못하지만
선비와 나는 한 몸이다.
―「현고수」 첫 부분
그냥 천장에 거꾸로 붙어 서서
조용히 손이나 비비고 있었더라면
간당거리는 파리 목숨
며칠 연장했을는지 모른다
―「파리」 첫 연
「현고수」는 화자가 일명 곽재우나무로 불리는 느티나무를 통해 나를 드러내지만 실은 곽재우의 패기에 찬 열정과 우국충정을 노래한 작품이고, 「파리」는 한 마리 곤충의 입을 빌어 한치 앞을 예측할 수 없는 ‘파리목숨’의 덧없음을 토로하되 현실세계의 비루한 삶을 환기시키는 작품이다. 두 작품이 이렇게 소재와 주제가 다르고, 방법론적 특성도 달라 작품의 우열을 가리는 기준을 찾기 어려웠다. 둘 중 하나를 대상작으로 뽑아야 하는 입장에선 난감했다. 여느 심사에서는 본심위원이 으레 둘 이상이라 서로 상의하여 우열을 가렸거니와 그렇게 하면 덜 힘들고 마음이 편했다. 그러나 이번 심사는 필자 단독으로 우열을 가리고 그 책임을 져야 하는 부담감 때문에 온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다.
고심 끝에 「현고수」를 대상으로, 「파리」를 우수상으로 결정했다. 「현고수」는 동봉한 응모작 「가을이 왔다」 「읍내여관」 등과 함께 시적 기량이 일정 수준 이상일 뿐만 아니라 상상력이 활달하고 시어를 조합하는 능력이 두드러졌다.
오늘 밤에는 귀뚜라미가 내 낡은 구두를 연주한다
구두 안에서,
구두의 노래를 귀뚜라미가 대신 불러줘서 얼마나 다행인가
... (중략)...
어쩌면, 지금 나를 열어두면
나중에 내가 한 행성을 지나갈 때
멀리서 새어나오는 읍내여관 불빛을 보며
내가 의령읍의 가을에 잠시 존재하였음을 깨달을 것 같다
― 「읍내여관」 허두와 결구
이 시인의 활달한 상상력과 시어를 조합하는 능력을 볼 수 있는 표현들이다. 아울러 이 시인이 관념을 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미지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시적 대상 자체를 구체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이미지를 사용하고 있는, 그런 묘사적 특성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묘사적 이미지 형성 방법은 시에 구체적 사실감을 안겨주는 데 기여한다.
우수상으로 결정한 김오늘의 「파리」 및 함께 응모한 시 「낚시 금지구역」 「완전한 수술」은 순위에서는 밀렸지만 작품의 우열 면에서는 그리 밀릴 것 없는 수준이다.
그냥 천장에 거꾸로 붙어 서서
조용히 손이나 비비고 있었더라면
간당거리는 파리 목숨
며칠 연장했을는지 모른다
...(중략)...
제 피로 무대에서 부고장을 쓰게 될 줄 몰랐다
사건 사고의 침엽수림 광고란에
붉은 꽃상여가 놓였다
이만한 죽음이면
평생 손 비벼 기도한 보람은 있는 것이다
― 「파리」 허두와 결구
예시에서 보는 바와 같이 표현이 활달하고 어조가 시원시원하다. 비참한 현실에 대한 비극적 인식이 절망감을 낳을 법도 한데 시인은 이를 낙천적으로 감수하면서 결코 기죽지 않는 자세를 보여준다. 만일 단일 작품으로 우열을 가린다면 어떤 선자는 「파리」를 대상 작품으로 밀법도 하다. 「파리」를 뒷받침하는 다른 시들의 무게가 골랐다면 좋았을 것이다. 다음과 같은 상상력도 더 힘을 받지 않았을까―<미끼도 없는데/고기는 끝없이 잡혔다/잡으면 잡을수록/강물에 고기가 넘쳐났다/퍼덕이는 고기를 보고/나는 낚시질을 그만둘 수 없었다/그 날 나는 고기를 잡느라/집에 돌아오지 못했다/나는 고기들에 파묻혀 죽어버렸다> 이 얼마나 함의가 많은 대목인가.
참고로 본 심사는 주최 측의 철저한 보안 속에 진행되었기 때문에 작품을 응모한 시인의 이름은 심사를 마친 이후에야 알 수 있었으며, 지면 관계상 미처 언급하지 못한 응모작들, 특히 「망우정에서」 「화살」 「빗살무늬, 획을 긋다」 등의 시가 몹시 마음에 걸린다.
- 심사위원 감태준(시인, 중앙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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