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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원 / 김겸

 

 

끝없이 펼쳐진 눈밭이다

바람이 마른 모래처럼 일어난 눈가루를 휘몰아간다

저 막막한 눈밭에 단지斷指한 손가락으로

정방형의 칸을 내어 너를 쓰고 싶다

그 설원의 원고지에 무제無題라고 할

너의 순일한 마음에 대해 쓸까

영어囹圄에 갇힌 너의 죄 없는 욕망에 대해 쓸까

새하얀 너를 앞에 두고 토해냈던

내 먹물 같은 설움에 대해 쓸까

저 막막한 눈밭에 단지한 손가락으로

정방형의 칸을 내어 너를 쓰고 싶다

그 설원의 원고지에 깨어나지 못한 너의

침묵에 대해 쓸까

이 쇠잔한 생에 표착한 너의 불운에 대해 쓸까

외로워, 외로워 말하는 가오나시顔無し 같이 끼니마다

밥을 보채는 너의 허기진 영혼에 대해 쓸까

정해진 과오를 범하고 정해진 책망을 듣는 너의 차갑 게 굳어진 습習에 대해 쓸까

저 막막한 눈밭에 단지한 손가락으로

정방형의 칸을 내어 너를 쓰고 싶다

하지만 내 가난한 가슴과 옹색한 문장으로는

너를 쓸 수 없다

너라는 이름의 눈밭은 오늘도 그만큼의

햇빛, 그만큼의 별빛을 받아 홀로 아득하다

너의 눈밭에 그물 같은 붉은 칸을 내려 한

미욱한 나를 연해 뉘우친다

아무도 미워해 본 적 없는

아무도 시기해 본 적 없는

너라는 이름의 눈밭

저 깊고 아득한 너의 설원

 

 

 

 

아직은 괜찮은 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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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생 지탱하는 구심적 시선

 

열심히 헤엄쳐도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생에서 단지 떠 있다는 사실에 의지하는 법을 배웠다. 시가 그 부력의 총량으로 느껴지는 때가 있어 아무도 모르게 절실했다. 하지만 나의 시 쓰기는 부끄러운 것이 되기도, 괜한 욕심으로 비치기도 했다. 이미 평론으로 소설로 나름 글을 써 왔기에, 하나의 장르에 대한 순정의식이 강한 우리 현실에서 그렇게 보이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렇다고 내적 개연성이 없는 것은 아니어서, 그것은 그동안 시 비평을 해 오면서 대했던 귀한 시편들이 내 마음에 옮아온 것이기도 하고, 세사에 현목하던 시선이 낮게 가라앉으면서 삶에 대한 태도가 구심적으로 변모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김겸'이란 시인으로서의 필명은 내 장편소설 '여행의 기술―Hommage to route7'에 나오는 아들의 이름이다. 곤한 마음, 잡아주신 두 분 심사위원님의 은(恩)에 깊이 고개 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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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사평] “근래에 보기 드문 유장미와 순정미 갖춰 눈길”


어렵고 힘든 시기에 더욱 풍성해진 응모작들을 보면서 '과연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새삼 던지게 됐다. 실존에 대한 깊은 질문에서부터 우리 시대의 각박한 현실에 대한 질문에 이르기까지 질문과 해답의 진폭은 크고 넓었다.

최종적으로 조미희의 '귀뚜라미에 대하여' 외 4편, 서이나의 'CU편의점' 외 4편, 김겸의 '설원'외 4편 등을 놓고 숙고를 거듭했다. 조미희의 작품들은 시를 직조해 나가는 힘이 뛰어났으나 응모작들이 고른 수준을 유지하지 못한 점이 아쉬움으로 남았다. 서이나의 작품들은 젊고 신선한 감각이 돋보이나 마무리가 약하다는 지적을 받았다. 김겸의 작품들은 산문적이고 현학적으로 빠지는 위험이 노출되기도 했으나 이를 뛰어넘는 유장미와 순정미를 획득하고 있었다. 이는 최근 우리 시단에 부족한 부분이라 더욱 눈길을 끌었다.

'설원'은 응모작들 중 이러한 장점이 가장 돋보이는 작품이어서 당선작으로 올리게 되었다. 아쉽게 탈락한 두 분에게는 다음 기회를, 당선자에게는 신인다운 정진을 기대한다.

 

심사위원 : 이영춘 · 이홍섭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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