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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발/ 마경덕

 

 

묵은 신발을 한 보따리 내다 버렸다.

 

일기를 쓰다 문득, 내가 신발을 버린 것이 아니라 신발이 나를 버렸다는 생각을 한다. 학교와 병원으로 은행과 시장으로 화장실로, 신발은 맘먹은 대로 나를 끌고 다녔다. 어디 한번이라도 막막한 세상을 맨발로 건넌 적이 있는가. 어쩌면 나를 싣고 파도를 넘어 온 한 척의 배. 과적(過積)으로 선체가 기울어버린. 선주(船主)인 나는 짐이었으므로,

 

일기장에 다시 쓴다.

 

짐을 부려놓고 먼 바다로 배들이 떠나갔다.

 



 

2003 신춘문예 당선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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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늦은 출발이지만 나에게 포기란 없다

 

증권과 자동차와 아파트를 얘기하는 친구들 곁에서 나는 시를 읽었다. 이미 그것들은 내게 위안이 되지 못했으므로. 값이 오른 증권과 새로 구입한 자동차와 평수를 늘린 아파트를 자랑하는 동안 나는 한 권의 시집을 먹어 치웠다. 도대체 그것들이 내게 얼마나 위로가 될 수 있는가. 시 한 편이 주는 넉넉함과 짜릿한 감동에 비한다면.


좋은 시를 만나면 알 수 없는 그 무엇이 성냥불을 확 그어댔다. 가슴에 치미는 왕성한 식욕. 그렇다. 지병인 식탐이 도져 아아, 나도 이렇게 맛난 시를 지어야지. 쩝쩝 입맛을 다셨다. 외로운 사람에게 내 글이 한 끼의 위로가 된다면 기꺼이 그의 밥이 되리라. 그러나 가진 건 오직 열정뿐. 아직 부족하고 많이 서투르다.


얼마 전 모 방송국에서 창사특집으로 '야생의 초원 세렝게티'라는 다큐멘터리를 방영했다. 강가에서 물을 마시던 누(gnu) 한 마리가 악어에게 다리를 물려 물속으로 끌려가는 광경은 참으로 처절했다. TV를 지켜본 사람들은 대부분 악어의 밥이 되는 누의 죽음을 예감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상은 빗나갔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포기하지 않는 끈질긴 집념. 한 마리 연약한 짐승이 보여준 삶의 의지는 감동 그 자체였다.


나는 지금 악어에게서 풀려난 누의 심정이다. 당선의 기쁨을 잠시 접어두고, 앞으로 넘어야 할 만만찮은 강을 생각한다. 저 절실한 누처럼 끝까지 시를 붙잡고 늘어지리라. 늦은 출발이지만 애써 서두르진 않겠다.


병 깊은 어머니를 지켜보며 실의에 빠져 있던 나날. 느닷없이 날아든 당선소식은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 세상엔 아직 따뜻한 사람들이 훨씬 많다. 손을 들어주신 심사위원님께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 보답하는 길은 열심히 노력하여 좋은 글을 쓰는 일.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다. 능력을 턱없이 믿어주신 정공채, 김경민, 이윤학, 정병근 선생님. 격려를 아끼지 않은 남편과 시향 동인, 여러 문우들과 기쁨을 함께 나누고 싶다.


 

그녀의 외로움은 B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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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대부분 상투적이고 내용모호

 

신춘시가 한국시를 망치고 있다는 말들을 한다. 좀 심한 소리지만, 근거가 아주 없는 것 같지는 않다. 실제로 최근 45년 동안에 신춘에 뽑힌 시들을 보면 대개 비슷비슷해서, 포즈가 공연히 비장하고 내용이 모호하다.

 

또 억지로 만든 자국이 역력하여, 이미지도 상징도 생경할뿐더러 리듬감도 없어, 살아 있는 시가 되지 못하고 있다. 이른바 산문 형태의 시가 많대서 하는 말만은 아니다. 하긴 내재율 따위는 말할 것도 없고 콤마나 피리어드를 무시하는 등 어법을 어김으로써 독자의 관심을 끌려는 유치한 시도도 신춘시에서 비롯된 대목이 없지 않다.

 

이런 시들을 선자들이 계속 뽑아 놓으니까 좋은 시의 전범처럼 되면서, 신춘 응모시들이 이런 시 일색이 된다. 나아가서 이것이 한국시가 독자로부터 멀어지는 한 원인을 제공하고 있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이번 경우도 예외가 아니어서 읽어가면서 매우 지루하고 답답했다. 그러다가 눈이 번쩍 뜨이는 작품이 찾아졌다.

 

그것이 마경덕의 시들이다. 우선 말하고자 하는 것이 분명하고 힘이 있다. 시를 가지고 무엇을 말할 것인가,그리고 어떻게 말해야 할 것인가를 분명히 터득하고 있는 시들이다.

 

특히 '신발론' '오래된 가구' 등이 두드러졌는데, 이만큼 무엇을 빼야 할 것인가를 안다는 것 자체가 시를 적잖이 공부해 왔다는 증좌다.

 

'굴뚝'은 소품이지만 이만한 서경의 시가 우리 시에 그리 많지 않을 터이다. 마경덕의 발견은 큰 수확이다.

 

이근화의 '만원 버스' 등도 상투적인 신춘시들과는 크게 달라, 재미있게 읽힌다. 표현이 아주 젊고 유연하다. '칠레라는 이름의 긴 나라'는 특이한 발상은 아니지만 경쾌하게 읽히는 미덕을 가지고 있다.

 

나쓰메 소세키의 산문집을 텍스트로 하고 있는 '유리문 안에서'에서 볼 수 있는 그의 시각도 매우 재미있는 것이다. 조금만 더 다듬으면 좋은 시인이 될 재목이다.

 

- 심사위원 김주연 문학평론가, 안도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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