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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 종로 / 김기연

 

 

마음의 외진 곳이 잔인하게 흩뜨려지는 새벽

나는 과묵한 종각을 지나서 종로 거리를 맴돈다

인도 곳곳에 쓰러져 있는 젊은 욕망 자루들을

밤을 버린 불빛이 난폭하게 비꼬고 있다

그들 위로 스쳐가는 살찐 야생 고양이들이

본능에 굶주린 듯 괴성을 할퀸다

나는 쉬지 않고 걸어가며

지친 다리에 우울한 숨소리를 기대보지만

마음은 구겨져 거리에 떨어진다

보도에 짓이겨진 쓰레기에 자신도 섞이고

마는 것을, 나는 스스로를 인정할 수 없었던

지난 기억들까지 쏟아 내며 빈속을 움켜쥔다

내가 쓰러진 자들을 밟고 서 있는 것은

지금 다른 누군가가 나를 잔혹하게

밟고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위선의 거리는 하얀 이를 드러내며 아침을

짖어대고, 야광 띠를 둘러맨 사람들이

밤의 부스러기들을 쓸고 있다

한 남자의 심장 박동이

다시 종각을 지나며 요란하게 종을 친다.

 

 

 

 

 

[우수상] / 고경숙

 

 

개나리 흐드러진

미군부대 담장엔

하릴없이 풍선껌 불어대는 아가씨

기대서서

봄볕만 비벼댄다

발밑엔 납작 엎드린 바람 한 자락

두리번거리다

여기쯤일까

시간이 머문 곳

오가는 차들은 서로 다른 언어로

고함을 지르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오늘 운세는

소득이 없이 분주하다 했는데

주소불명으로 되돌아온

고향 소식도 자꾸 걸리고

아슬아슬한 영혼들이

고양이처럼 도시를 기어다니는

봄은 화사한 슬픔이다

고독한 기다림이다

 

 

허풍쟁이의 하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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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상] 호명呼名 / 김효정

 

 

익명의 나무들에게 눈 맞추던 봄햇살이

하나하나 이름을 불렀다

자신의 이름 불리워질 때마다

연록색 잎 비죽 내밀거나

노오란 웃음으로 한껏 흐드러지거나

도도한 미소로 시선 날렵하게 치켜뜨면서

저마다 이름표 내걸었다

 

아파트 담장 아래 뻥튀기 아저씨도

봄볕이 불러 나왔다 보다

동그런 송잡이에 햇살 자락 감아 돌리면

후끈 달아오른 공기 아른아른 녹아내리고

 

'뻥이오~' 외침이 하얗게 퍼졌다

담장 너머 짐짓 딴청 피우던 나무도 덩달아

옥수수알만한 꽃망울 펑펑 튀기며

풍성하게 매달린 향기로 벚꽃이라고 퍼뜨렸다

 

그 향기 날 부르는가 싶어 마음 마저

하얀 쌀 튀밥처럼 부풀어 나갔니

누가 호명하였을까

그늘진 담벼락 선거 벽보엔

몇 번 보았음직한 낡은 미소들

'뻥뻥' 소리만큼이나 커다란

이름표 달고 줄줄이 먼저 나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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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목 / 고경숙

 

연대기를 알 수 없는
검은 책이다
먼 시간을 집대성한 페이지를 넘기면
불탄 새의 발자국이 떠도는
바람의 유적지
막다른 길에서 시간은 일어선다
이마에 매지구름 걸쳐놓고
진눈깨비 맞는 산,
박제된 새소리가 나이테를 안고
풍장에 든 까닭 차마 발설할 수 없어
활활 피우는 눈꽃은 은유다
명조체로 흐르는 햇살이 서술하는
몰락한 종교의 잠언서
나무의 필적이 행간을 읽는 동안
다하지 못한 어둠이 전하는 고전이다
꺾인 나뭇가지는
허공을 수식하는 문장이다
숨찬 몇 권의 눈부심이 사리처럼 반짝인다
새떼들 젖은 울음이 밑줄을 긋고
구전하는 말씀들
일편단심이다
생은 뼈를 삭이는 절명시다

맨몸으로 그루잠을 건너온
울창한 기억들
작자미상의 목판본 한 질을 집필하고 있다

 

 

 

혈을 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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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시, 낯선 얼굴로 만져주던 존재

 

탁구공이 내는 소리가 좋아 탁구장을 찾았던 기억이 있다. 정적을 깬 소리가 닫힌 나를 열고, 달팽이관 속의 웅크린 어둠을 먹어치운 뒤 내 눈빛마저 단숨에 삼켜 버렸다. 온몸을 던져 톡톡 우는 그 소리는 눈부시게 반짝거렸으며 짜릿한 쾌감을 주고도 남았다.

시도 그랬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공을 주시하는 것처럼 시 역시 늘 낯선 얼굴로 와서 동그맣게 울었다. 그 울음은 차갑고도 명징해 귀먹은 나를 어루만졌고, 한 점 의혹도 없이 빠져들었다. 간간히 성마른 소리로 외면하기도 했으나 귀에 쟁쟁한 흐느낌을 모지락스레 떨쳐 버릴 수 없었다. 아마도 부딪힘이 주는 아픈 여운 때문에 시의 탁구대 앞에 섰는지도 모르겠다.

맑고 투명한 소리가 전신을 휘감고 돈다. 이는 분명 시가 나를 부르는 신호이리라. 내부 깊숙이 들어와 엉거주춤 서 있는 나를 움켜쥐고, 시의 라켓을 들라고 한다. 두렵다. 하지만 내가 던진 공은 작고 가벼우나 내 시의 소리는 장대하기를 바랄 뿐이다. 다산어록에서 시는 자연스러우면서 해맑은 여운이 그 어려움이라고 했다. 명심할 점이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시의 걸음마는 활달한 상상력임을 강조하신 유병근 선생님, 절제된 언어의 미학으로 큰 가르침을 주신 하현식 선생님께 고맙다는 인사를 올리고 싶다.

아울러 생각지도 않은 웃음보따리를 선물하신 심사위원님과 한라일보사에 감사를 드린다. 내 시의 영원한 구경꾼인 남편과 두 딸, 미지와 영지에게도 사랑한다고 시적으로 말하고 싶다.

 

 

 

 

유령이 사랑한 저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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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선명한 묘사, 참신한 비유 돋보여

 

1300여편에 이르는 많은 작품들 중에서 한 편의 뛰어난 시를 고르는 일은 무척이나 지난했다. 오랜 수련과 고뇌를 거쳐 생산되었을 다기한 사연의 시들은 그 부피와 다양성만큼이나 압도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사자의 눈을 확 트이게 하는 작품은 쉬 찾아지질 않았다. 여러 번 읽고 또 읽어서. 수준급의 기량과 언어의 진정성을 확보하는데 있어 다른 응모작들과 차별성을 보이고 있는 시편들로 우종태씨의 '대패질'외 2편, 김화섭씨의 '빈집에 서다'외 2편, 고경숙씨의 '고사목'외 3편을 최종적으로 선별해놓고 고심을 했다.

우종태씨의 경우 오랜 습작을 거친 분답게 시를 끌어가는 저력과 안정된 짜임이 돋보였지만 뒷심이 조금 딸리는 듯했다. 김화섭씨의 '빈집에 서다'는 묘사와 진술능력이 뛰어나고 이야기의 전달도 뚜렷했지만, 다른 작품들이 그에 상응하는 경지를 보여주고 있지 않아 아쉬움이 남았다. 고경숙씨는 언어를 다루는 재치가 상당해보였다. 묘사의 선명성이나 비유의 참신함에 위트까지 두루 갖췄고 리듬에 대한 고려도 엿보인다. 그러나 재치가 승해서일까, 가끔씩 어휘가 시적 맥락 안에서의 조화를 잃고 튀는 흠결이 있었다. 나름대로 각각의 장점과 단점을 공유하고 있었으나, 무엇보다도 시가 언어의 예술이라는 근본 명제를 들어 우리는 최종적으로 고경숙씨의 '고사목'을 당선작으로 밀기로 했다. 이 외에도 한교만, 안은주, 백명희, 이경옥 제씨의 작품들도 충분한 가능성을 갖고 있었음을 밝혀둔다. 당선자에게는 축하를, 아쉽게 탈락한 분들에게는 격려와 함께 지속적인 정진을 부탁드린다. 시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에게 축복 있으라!

 

심사위원 김승립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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