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심사 애기똥풀 / 황인산
개심사 들머리 애기똥풀은 모두 옷을 벗고 산다.
솔밭에서 내려온 멧돼지 일가 헤집는 바람에 설사병이 났다.
개중에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얼굴 마주보며 괴춤만 내리고 쉬를 하고도 있지만
무리무리 옷을 훌렁 벗어젖히고 부끄러움도 모른 채 물찌똥을 누고 있다.
사천왕문 추녀 밑에서도 노스님 쉬어 가던 너른 바위 옆에서도
산길 오르내리는 사람들의 시선은 아랑곳없이 노란 똥물을 갈기고 있다.
부글부글 끓는 배를 옷 속에 감추고 산문을 두드린다.
이 문만 들어서면 아침까지 찌들었던 마음도 애기똥풀 되어 모두 해소될 것 같다.
산 아래서부터 진달래가 산불을 놓아 젊은 비구니 얼굴을 붉게 물들인 지가 언제인데
절집 위 옹달샘 풀숲까지 노란 산불에 타들어 가고 있다.
개심사 해우소는 천 길이나 깊다.
전날 마신 술 때문에 요동치는 배를 잡고 허리띠를 풀며 뛰어 들어갔지만 이런 낭패가 있나, 깊이가 몇 길은 되어 보이는데 얼기설기 판자로 바닥만 엮어 놓고 군데군데 구멍만 뚫어 놓았지 칸막이가 없다. 엉거주춤 볼일 보던 사람, 앉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선 것도 아닌 자세로 오줌을 누는 사람들의 시선이 참 어정쩡하다. 몇몇의 눈길이 동지애를 느끼며 같은 자세를 취하길 원하였지만 안사부인 볼일 보는 화장실을 열어본 것처럼 놀라 아랫배를 내밀고 엉덩이에 댄 두 손에 힘을 주고 나왔다.
천년 전 처음 이곳에 볼일을 본 스님은 자꾸 다시 들어오라 하는 것 같은데
보잘 것 없는 내 아랫도리 하나로 하늘도, 가냘픈 애기똥에 기댄 마음도 옷을 벗지 못한다.
개심사를 감싸고 있는 상왕산은 노란 산불에 타들어 가고 옆 칸에서 나오다 눈길 마주친 젊은 비구니의 얼굴엔 진달래 산불이 다시 옮아 붙고 있다.
[심사평]
예년에 비해 응모작들의 수준이 매우 높았다.
내용이나 형식은 다양하면서도, 가장 많이 다룬 주제들이 사람 혹은 사람의 구체적 삶이라는 점도 눈에 띄는 대목이었다.
자신이 속해 있는 가족과 사회가 한 시인을 낳고 성장시키는 데 얼마나 중요한 씨앗이 되고 또한 큰 토양이 되고 있는가 하는 문제도 심사를 하면서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심사하면서 신명이 났던 것은 당선작으로 뽑힐 수 있는 시들이 여러 편이었기 때문이고, 곤혹스러웠던 것은 부득이 한 편만을 당선작으로 골라야 했기 때문이다. 예컨대 ‘진달래 개나리 목련’(강태승), ‘개심사 애기똥풀’, ‘다이어트’(황인산), ‘기관사’, ‘그녀가 내 마음의 틈에’(박영식), ‘숨바꼭질’, ‘어느 여름밤’(홍성준) 등은 모두 당선작으로 뽑아도 손색이 없는 작품들이었다.
‘진달래 개나리 목련’의 성적 상상력은 일단 심사자의 눈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밝고 환한 색채감으로 현란할 뿐더러 활기차고 생명력에 넘치는 시다. 하지만 문예전문지가 아닌 신문은 이런 작품을 수용하기 어려운 여러 사정이 있음이 유감이다.
‘노래’라는 부제가 붙은 ‘기관사’는 마치 기차를 타고 아름다운 풍경을 뒤로 하면서 달리는 느낌을 주는 재미있는 시다. 주제와 걸맞는 속도감도 있다. 같은 작자의 ‘그녀가 내 마음의 틈에’는 연륜이 느껴지는데도 상큼하고 경쾌하다. ‘어느 여름밤’과 ‘숨바꼭질’은 삶의 아픔과 고달픔을 정면으로 다루고 있는 고통의 시다.
특히 ‘숨바꼭질’은 최근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청년실업의 문제를 관념적 상투적으로가 아니고 구체적으로 다루어 울림이 크다. 화자 대신 일하러 나갔다 들어오는 아내를 술래에 비유한 대목도 실감이 난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것도 작자의 오랜 연마를 말해주고 있다.
‘다이어트’와 ‘개심사 애기똥풀’은 세상을 보는 눈이 깊으면서도 가파르고 메마르지 않고 넉넉하고 여유로운 장점을 가지고 있다. 만물의 존재와 사람의 삶에 대한 깊은 사랑과 이해에 연유하는 상상력일 터이다.
한편 ‘개심사 애기똥풀’의 둘째 연에서 볼 수 있는 것 같은 ‘천 년 전 처음 이곳에 볼일을 본 스님은 자꾸 다시 들어오라 하는 것 같은데’의 상상력은 속도와 능률만을 최고의 가치로 생각하는 오늘의 삶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기능도 갖는다. 빡빡하지 않고 조금은 느슨하고 조금은 유머러스한 표현들도 시의 맛을 살린다.
이상 네 투고자를 놓고 심사자들은 한 사람을 선택하기가 쉽지 않았다.
오랜 숙고와 많은 토의 끝에 결국 황인산의 ‘개심사 애기똥풀’을 당선작으로 뽑은 것은 조급하게 서두르지 않으면서 삶과 사물을 깊이 있고 폭넓게 인식하려는 그의 시들이 우리 시대의 새로운 시적 화두가 되기에 충분하다고 판단해서였다.
심사위원 유종호. 신경림
열다섯 번째 지용신인문학상 수상의 영광은 서정적인 분위기의 '개심사 애기똥풀'이란 작품으로 문을 두드린 황인산(45, 서울시 용산구)씨에게 돌아갔다. 황씨는 "처음 수상 소식을 듣고는 백지장 같이 눈앞이 멍해지는 것 같았다"며 "늘 부족하다 생각했던 저로서는 믿겨지지가 않았다"고 어리둥절했던 당시의 심정을 털어놨다.
'개심사 애기똥풀'은 2년 전 황씨가 충남 서산에 있는 사찰 '개심사'를 방문했을 때 기억을 더듬어 탄생시킨 작품이다. 개심사 '해우소'는 칸막이가 없어 볼일 보는 사람들이 서로 바로보며 일을 치를 수밖에 없다. 다소 황당하기도 하고 민망하기도 하지만 이때의 기억이 황씨에게는 깊은 인상으로 남았다.
벌거벗은 채 마주하며 당황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허물을 감추려 애쓰는 현대인들의 위선과도 맞닿아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황씨는 이 같은 날카로운 문제의식을, 날 것 그대로 드러내기보단 가급적 부드럽고 서정적인 분위기로 담아냈다.
하여 '개심사 들머리 애기똥풀은 모두 옷을 벗고 산다'고 그의 시는 시작된다. 황씨는 이 시대 시인의 역할에 대해 "시인은 항상 사회에 반발을 앞서가야 한다"며 "야만의 시대에는 시의 칼날을 세워야 한다"고 말했다.
황씨가 '시'를 '업'으로 '취미'로 삼은 지는 벌써 20년이 지났다. 그렇게 시작한 작품 활동은 방송통신대 국어국문학과 재학 시절 문학동아리인 풀밭동인회를 만나며 더욱 풍성하고 깊어졌다.
심사를 맡은 유종호(문학평론가, 연세대 석좌교수), 신경림 시인은 '개심사 애기똥풀'을 당선작으로 뽑은 것은 조급하게 서두르지 않으면서 삶과 사물을 깊이 있고 폭넓게 인식하려는 그의 시가 우리 시대의 새로운 시적 화두가 되기에 충분하다고 판단해서였다"고 밝혔다.
올해 지용신인문학상에는 299명, 3천163편의 작품이 출품됐다. 시상식은 15일 오전 11시 옥천군청 대회의실에서 열릴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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