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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집 / 김명희

 

 

내 유년 가까운 곳에는 개성집이라는 술집이 있었다
늙은 작부 하나가 있었고 아버지 부랑의 날들이 있었다
붉은 입술에 검은 점,
저녁이면 문득 툇마루 끝에 걸리던 속살 속의 노을,
개성집은 우리들의 적이었다
밤이 깊으면
낡은 송학표 주전자가 시끄럽게 장단을 이끌어주던
검은 루핑 지붕 밑에서 아버지는 몇 날 며칠을 머물렀다
아교처럼 단단한 아버지의 편력은 여름내 계속되었고
그럴 때마다 나는 어머니에게 떠밀려 그곳을 들르곤 했다
돌아오는 길엔 눈깔사탕과 은전 한 잎이 내 안으로 넣어졌고
나는 사탕이 다 녹기도 전 어머니에게 둘러댈 붉은 변명들을
입 안 한 켠에 감춰야만 했다
그.게.슬.픔.인.지.도.모.르.고

어린시절 내 슬픔 가까운 곳엔 개성집이라는 유곽이 있었다
아카시아는 밤마다 멀미처럼 부풀어올랐고
저녁의 라디오 속에선 붉고 격양된 노래들이 꽃잎처럼 쏟아져
나왔다
조팝꽃이 끝나면,
한낮의 길엔 양산을 쓴 여인 하나 가볍게 스치었고
그런 날 어머니의 가슴은, 해가 지고 오랜 뒤에도
쉽사리 저물지 못했다

 

 

 

 

화석이 된 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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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긴 밤 지새우던 신앙같은 詩”

 

비닐봉투에 팽팽히 담겨지던 하루가 막 일몰의 허리띠를 풀기 시작한 그 틈으로 뜻밖의 당선통지를 받았다. 그 동안 나는 무조건 ‘시’에 미쳐있었던 것 외엔 정말이지 준비 된 게 없었다.


‘시’의 산을 오르며 전신이 부러지고, 찢어지고, 피가나고, 굴러 떨어지기를 여러 번. 이제 다 왔구나! 하고 온 몸의 상처를 핥고 있는데…. 지금 선 바로 그 자리가 해발0. “자! 이제 부터는 더 가파른 산을 올라야 합니다”라고 말씀 하시던 내 문학의 어버이신 박경원 선생님께 가장 먼저 큰 절을 올린다.

 

그리고 늘 묵묵히 믿음으로 나를 지켜봐 주시던 차령문학회 회장 민성훈 선생님과 지금 이 순간에도 치열하게 문학의 능선을 넘고 있는 차령문학 회원들과 “우리말 지킴이로써 언제나 사명을 다해야 하는 게 시인”이라고 늘 애정으로 다그쳐 주시던 김양헌 선생님의 인자하신 모습이 지금 이순간 눈에 선하다.

 

밤 늦도록 흔쾌히 강의실을 내어주시던 안성시립도서관 유병장관장님께 감사 드리고 ‘시’에 관한한 밤과 낮과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던 안성도서관 문우들, 지금까지의 내 길을 믿고 지켜 봐준 남편과 한 없이 부족한 엄마를 넓게 이해하고 도와준 나의 보석인 영광이와 선영이, 사랑하는 선배님들, 그리고 나를 낳아주신 부모님께 진정으로 감사의 마음을 올린다.

 

그리고 아직 부족한 나의 시에 날개를 달아 주신 김수열 심사위원 선생님께 머리 숙여 감사의 인사를 올린다.

 

나의 일상은 언제나 내 몸 밖으로부터 전해져 오는 에너지들에 대한 궁금증으로 가득 했다. 세상 모든 것에 깃들어 있는 영혼들이 수시로 내게 접속해 옴을 감지하며 그 언어들을 해독하기 위해 긴 밤을 하얗게 보내기를 여러 번, 언제 부턴가 ‘시’는 나의 신앙이 되어 있었다.

 

그 동안 나의 시가 되어 준 세상 모든 에너지들에 감사와 고마움을 전하며 앞으로 더욱 섬세하게 정신을 열어 난청지역에서도 능히 듣고 해독하며 기록하고 전달 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붉은 해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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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부박한 시대에 던진 낮은 목소리

 

공모 마감일까지 접수된 원고가 오백 편을 훨씬 웃돌았다. 지방언론사에서 주최하는 신춘문예 치고는 결코 적지 않은 분량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응모한 예비 작가들의 면면이다. 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학생에서부터 칠순의 어르신에 이르기까지 무척이나 다양하다. 어디 그뿐인가? 응모한 작품의 발신처가 전국의 경향각지를 총망라하고 있다. 영상 시대의 도래를 맞아 문자 매체에 사형 선고를 내리는데 주저하지 않는 일부 비평가들의 지적이 한참 어긋났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인간이 존재하는 한 문학은 영원할 것이라는 믿음을 다시 한번 마음에 새긴다.

혼을 담아 꾹꾹 눌러쓴 시와 그 시들의 행간을 읽으면서 내내 행복했다. 많은 예비 작가들이 오랫동안 가슴 깊이 새겨둔 기쁨과 슬픔, 순수함과 아름다움, 아픔의 흔적과 덧난 상처들을 엿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시를 아끼고 가까이 하려는 마음을 읽을 수 있어서 더없이 좋았다.

지금도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작품으로는, 이성임의 ‘별을 굽는 여자’, ‘시계대학병원이 있는 골목’, 박은영의 ‘놀러 와 주실 거죠?’, 조성란의 ‘동검도 폐교’, 이진화의 ‘귀뚜라미가 사는 동네’, 김명희의 ‘개성집’, ‘냅일물’ 등이다.

모두가 적지 않은 시력(詩歷)을 확보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특히 이성임의 시편들은 시를 포착하는 지점이나 감성에 있어서 기성과 다를 바 없는 수준작이었다. 굳이 흠을 잡자면, 시의 본질이라 할 수 있는, 시인의 내면세계에 대한 뜨거운 통찰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보다 깊이를 더한 그의 시에 많은 기대를 걸고 싶다.

당선작인 김명희의 ‘개성집’은 우선 시의 깊이와 감동에 있어서 독자를 사로잡는 힘이 있다. 한없는 가벼움이 미덕처럼 횡행하는 부박한 시대에 던지는 낮은 목소리처럼 내게 다가왔다. 그의 다른 작품들도 우열을 가늠하기가 힘들 만큼 고른 수준이었다. 물론 흠이 없는 것은 아니나 당선자로 선정하면서 굳이 언급하고 싶지는 않다. 이를 기화로 시의 밭을 일구어나갈 마음가짐이면 축하의 꽃다발을 받기에 앞서 마음의 죽비를 들어야 할 터이다.


심사위원 김수열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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