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연습1 / 손상호
해를 껴안고 울다 울다 지친 달맞이꽃 주변을 물잠자리가 새까맣게 날고 있는 뚝방, 머리에 꽃을 꽂은 저 여자는 누구의 여자일까 배고픈 꽃이 툭하면 봄을 파는 가을에, 일부는 삭제하고 일부는 가림처리하고도 거짓말처럼 꽃의 속살이 보여, 가을이 아니더라도 이별해도 좋을 날이 올까 하늘 시퍼런 날에 꽃은 더 불행하다해서 야한 꽃이 되어 몰래 정을 통한 우리가 어떤 벌과 용서를 받게 될지, 바람이 불어도 떨지 못하는 꽃이나 바람이 멈춰도 떨고 있는 꽃에게, 돌틈이라도 좋을 어디 몸 맡길 곳은 없는지 사흘 내린 비에 젖지 않는 강이라 서울의 신호등이 좀처럼 켜지지 않아도 축협 앞 마른 버들에 물이 오르면 장바구니를 들고 횡단보도를 건너오는 아내를 만날까 수줍은 듯 몸을 가리고 내 뒤에 숨어 있을까, 이별 오기 전에 내가 살린 꽃
이별연습2
내 배꼽에는 열쇠가게 스티커가 겹겹이 붙어 있고 배꼽아래에는 사우나탕 스티커가 더덕더덕 붙어 있지요 몸이 무거워진 나는 신호등이 짧은 축협 네거리를 건너가지 못합니다 힘들면 서울로 오라시는 김형, 5월인데도 동강(冬江)이 풀리지 않았습니다 서울에 갔다가 욕본 여자는 오늘도 소주를 병 채로 마십니다
여자의 등 뒤에서 붉은 해가 솟았지만 여자는 여전히 안개를 껴안고 놔주지 않습니다 시든 물매화처럼 물때 짙은 강을 목 놓아 부르다가도 금세 안개를 쫒아 다닙니다 이렇게 풍요로운 날, 마른 강에 빠진 여자를 나는 잘 모르겠습니다 갑자기 물비린내가 싫어 허리에 차고 있던 강을 내다버렸겠지요 서울행 비둘기호를 타고 붉은 나무들의 숲으로 떠났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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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좋은 세상이다. 우표를 부치지 않아도 돌아오지 않고 창밖에 주먹눈이 내려도 길이 막히지 않는다. 인터넷이라는 요술 우체부 아저씨가 부치자마자 전해주는 세상인데도 예나 지금이나 바뀐 주소로는 전할 수 없었던 그 편지, 그 편지를 누가 쓰고 있다. 누군가가 살면서 부르는 애닯은 노래가 시라고 하니 편지도 시가 될 것이다. 바람에 흔들리면서 써내려가는 게 시라면, 바람에 흔들리며 피는 꽃도 시가 되겠지. 바람 부는 날에는 떨어지는 것으로, 바람 멎은 날에는 서 있는 것으로 시가 되지. 시인들은 통증을 잊으려 악을 쓰며 시를 쓰지만 꽃은 서 있는 것만으로 시가 되지, 떨어지면서 더 멋진 시가 되지.
뒤늦게 보내는 편지라 생각하고 보낸 원고, 세상에 내보여도 되겠다는 연락을 받고 잠시 좋기도 했는데 몇 분이 흘렀다고 그새 통증으로 돌아온다. 좋은 세상이라고? 사는 게 고통이라 했고 꽃이 되기 위해서는 치명적인 통증을 수없이 겪어야하는데도? 힘이 되어준 가족과 격려해준 이웃이 고맙다. 내가 계속 시를 쓰게 하는 힘이다. 졸시를 선해주신 분들께는 오래 가는 시향으로 고마움을 갚고 싶다. 찔레꽃 진자리에 마른 갈꽃이 눈처럼 보인다.
찻잔 / 김을남
국화향기 그윽한 늦은 오후
공원 벤치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찌그러진 찻잔
빈 찻잔 속엔 무슨 사연이 있을까 !
그리움과 보고픔이
외로움과 슬픔이
분노와 복수심을 담아 마셨을까 !
해결되지 못한 것들을 생각하며
한없이 쥐어짠 손톱자국
원한의 무게에 못 이겨 주저앉은 모습에
석양은 흐느낀다.
[당선소감] 내생애에 제일 기쁜 날이라 생각이 듭니다. 제가 쓴 글을 눈여겨 보아주신 심사위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뜻밖의 일이라 어리둥절 하늘의 별을 딴 기분입니다. 이 나이에 이런 큰 복을 받는다는 것을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입니다. 부족한 한 사람을 건져주신 아시아일보 작가 선생님 존경합니다. 남은 인생 글로서 채우고 싶습니다. 많은 조언과 충고를 바랍니다. 거듭
삶, 아름답고 고달픈 것 / 심형민
민들레 꽃씨 하나
팽그르르 내려 앉아
쭈뼛 거린다
힘겹게 틈을 비집어 보지만
결코 만만치 않다
때로는 파도타기처럼 스릴 있고
콘크리트담장만큼 경직되고
고달픈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눈부신 황금빛 꽃잎만큼이나
곱고 향기롭고
부딪고 핥이고 마모되고
바스러져도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충만하고 아름답고
한 송이 노란 민들레처럼
강인한 삶이고 싶다.
[당선소감] 시를 쓰려고 하면 할수록 시에서 멀어지는 것 같아서 고통스러웠습니다. 내 마음의 말들이 갈 곳을 잃고 제 멋대로 나뒹구는 시가 되고 말아 부끄러웠습니다. 시의 언저리에도 가지 못한 제 졸렬한 말들을 기꺼이 끌어 안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막 걸음마를 떼는 제게 크나큰 영광의 순간을 함께 할 수 있게 해주신 아시아일보와 심사위원님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먼저 타개한 사랑하는 ‘경민’언니에게 이 영광의 졸작을 바치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외계 행성지구 정복기 / 이소정
지구는 우주 안 외딴살이 집을 지은 묵직한 덩어리
저물도록 궤도로 돌아오지 못한 이 행성을 눌러 만든 에너지 바
영양가 짓눌려 뭉친 에너지바에
창문 으깨진 스페이스셔틀 하나를 착륙시킨 외계인
이 육중한 에너지 바의 가격은 800원
아몬드 살짝 눅눅하고 카라멜은 녹았지만 그런대로 맛은 괜찮은 에너지바 쌉니다 싸 안사도 되니 맛 한 번 보슈
외계인들이 맛본 에너지 바는 더 없이 혀에 착착 감기다
속이 궁금한 고칼로리 에너지 바 한 입 씹어 속을 여니
뚱뚱하고 유분 잘잘 흐르는 백아몬드 수분없는 미이라처럼 비틀어진 흑땅콩
녹아버린 카라멜에 기름처럼 까맣게 고인 초콜렛 거죽이 조소한다
이거 뭐 이래요 외계인들의 툴툴거리는 불평에 노련한 지구표 장사꾼은
원래 다 그런거야 살껴? 언질을 던져도
800원 염가도 비싸다는 팔다리 여러 개 달린 외계인의 머리 굴린 흥정에
장사꾼은 1+1 덤까지 듬뿍 쳐주며 기어코 팔아넘기다
외계인은 바가지를 써도 한 참 바가지 뒤집고 산 줄 몰라
안드로메다로 돌아와 산더미처럼 지구를 소파위에 던져놓곤
아내에게 어깨를 으쓱 거린다
그러자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딸내미,
아빠 이거 맛없어.
[당선소감] 버스 안이었다. 백 번의 상상과 한 번의 현실이 교차하며 당선을 알려주었다. 한창 입시를 준비할 나이에 시를 쓴다는 타박에 대한 약간의 서러움이 풀리고 어떤 면허를 받은 기분이었다.‘이젠 시를 써도 된다, 는 당위성 정도. 어떠한 안도감까지 느껴지고 의자에 기대어 창밖을 바라보았다. 따뜻한 의자와 언 유리. 때마침 시린 눈이 모락모락 나고 있었다. 정말 완벽했다.
살얼음 / 이혜순
깨진 거울 위를 걷는다 침묵 위로 의심이 나무처럼 뿌리 내리는 시간 나는 당신의 심장 안에서 잠든다 당신은 섬세하고 투명한 유리였는데
이렇게 깊게 뿌리내렸구나 나를 밟고 지나가는 수천의 나무 뿌리였구나 하늘에서 내려오는 나뭇가지가 바닥의 눈물 핥아먹는 불운의 방식. 차갑게 흔들리는 물을 덮고 눕는다
당신의 나라는 흔들리는 문장, 한 걸음도 걸을 수 없는 실금 같은 분열이 뻗어 내린다당신의 의심과 나의 의심 녹음으로 만나는 나무 위에서 우리 한 번만 다시 만나 눈인사를 나누자
살얼음낀 호수의 얼굴에 바람꽃을 뿌린다 죽음의 시간 견딘 봄과 여름의 파문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파란 하늘은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흰 구름을 뭉게뭉게 펼쳐놓을 것이다
나는 당신의 영토에 발 딛지 못하고 당신 또한 나의 영토에 오는 법 모르니 나의 가슴에 커다란 물빛 하늘 들여 놓고 얼음의 비늘을 떨어뜨린다
물결 위에 남겨진 당신의 손금, 봄이 올 거라고 조록조록 살얼음 틔우고 있다 심연에서 거꾸로 박혀 짙푸른 눈짓 던지고 있다 수 백 겹의 투명한 얼음 꽃잎 한 뭉치씩 던지고
있다
[당선소감] 크리스마스이브에 눈사람 같은 소식
늘 의심만 해오던 당선 통보를 받고 보니 이것이 생시인가 싶습니다. ‘당선시 5편을 이메일로 보내시오’ 라는 간단한 문구는 오랫동안 기다려온 반가운 소식이었습니다. 그러나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오랜 시작의 과정을 격려해 주셨던 선생님들이 먼저 떠오릅니다. 중앙대 예술대학원 선생님들 시의 가능성을 인정해주셨던 차창룡 선생님 지극한 관심으로 시를 이끌어주셨던 이승하 선생님 차분한 가르침으로 힘을 실어주셨던 김기택 선생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경희 사이버 대학교의 시창작강의를 해주셨던 이문재 선생님 시인이 되기보다 먼저 사람이 되라고 하셨지요. 이영광 선생님 박형준 선생님 이덕규 선생님께도 감사를 드립니다. 힘들 때마다 격려를 아끼지 않았던 천서봉 시인, 유종선 시인, 수피아 시인께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아버지와 같이 인자하게 다독여주신 이수익 교수님께도 감사의 말씀 올립니다. 서지님들 감사드립니다.
지금 아직 겨울인가요. 하지 못한 말들이 살얼음 밑에 쌓여 당신들께 가 닿게 되기를 소망해봅니다. 꽃잎의 계절 힘든 일터에서 시를 살고 있을 당신들과 시에의 가능성을 담보로 삶의 터전에서 시를 일구고 있을 당신들과 이 기쁨을 함께 하고 싶습니다. 엄마는 왜 아직 시인이 아니냐며, 은근히 詩업을 재촉하던 우섭이와 아직 철없으나 꽃봉오리 같은 유정이에게도 고맙다는 말을 전합니다. 끝으로 못난이의 손을 들어주신 아시아일보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머리 숙여 감사인사를 올립니다. 누가 되지 않도록 각고의 노력을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