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대상] 응어리 / 김 은
상자 안에 넣어둔 접질러진 종이 하나가 운다
흥건한 상자가 가슴의 문을 열자
눅눅한 창문에 나라는 사람이 새겨진다
김 서린 손가락으로 한 글자 서툴게 남기니
이번엔 나라는 글자 하나가 줄줄 흘러 운다
내 책 속 곰팡이를 향수병에 모두 담아
낡은 품에 뿌리는 족족 난
동화 속 아이처럼 하염없이 착하게 누그러진다
타다 남은 촛불 하나 생경하게 당겨진 시큰한 밤,
방이란 상자에 담겨 가슴을 톡 접질린 내가
축축한 얼굴로 그 미운 종이를 펴면서
천년 별빛을 타고 흐르고 또 흐른다
멸종하지 않는 바다거품처럼
멍울지는 이 더운 시간 속에
[금상] 갈고리 / 김희철
언제부턴가
그의 팔은 보이지 않았다
유압프레스, 밀링, 선반, 사출기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한숨소리를 삼켜버렸다
소리가 잘라버린 건
팔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소매 안에서
조심스럽게 칼을 꺼내었다
그것은 스치기만 하여도
자꾸만 가슴을 찌르려했기에
칼집 속에 숨겨두어야 했다
그는 칼을 들고 육교위로 나갔다
사라진 팔의 빈자리는 너무 무거웠지만
행인의 시선을 단번에 베어낼 만큼
칼은 날카로웠다
바람마저 자를 수 있다는 듯이
소맷자락을 펄럭였다
양은 냄비는 베어낸 소리를
쉴 새 없이 보여주고 돌려주느라
쉬이 닳아지고 찌그러졌다
구두쇠의 무딘 소리까지 베어지자
아주 쭈그렁이 되고 말았다
발자국 소리가 다가오자 스윽 날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