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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와 공터  / 김충규

 
그 의자는 다리 네 개 중에서 하나를 잃었다
의자는 단지 다리 하나만을 잃은 것이 아니다
중심을 잃어버린 것이다
겨우 다리 하나를 잃었을 뿐인데
의자는 자신의 생애를 폐기 당한 것이다
물론 그것이 의자가 원한 생은 아니었다
처음 이 세상에 나왔을 때
대통령을 모실 수도 있었고
이발사를 모실 수도 있었고
물론 과부를 모실 수도 있었다
대통령을 모셨다면 의자는 버림받지는 않았을 것이다
대통령의 기념관에 잘 보관되었을지도 모른다
이발사나 과부를 모셨다고 해도 꼭 버려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의자는 공터의 구석에 반쯤 기울어진 채 앉아 있다
아무도 앉지 않는다 중심을 잃었다는 것은
사랑을 잃었다는 뜻이다
재활용 수거 차량도 의자를 외면하고 가 버린다
실내에서만 살았던 의자는
공터에 나온 이후로 비도 맞았고
눈발에 덮여 보았고 찬바람에
살갗을 긁혀 보았다
풀을 보았고 꽃을 보았고 나비를 보았고
물론 벌도 보았고 주인만이 아닌
여러 사람들을 보았고
또 아이들의 웃음소리도 들었다
비록 중심을 잃었지만
의자는 현재의 삶이 더 흐뭇하였다
누군가에 의해 잃어버린 다리를 얻고
어디로 실려가는 것을 원치 않는다
의자는 언제까지나 공터에 남아있기를 원한다

기울어진 몸으로 바라보면
정작 기울어져 있는 것은 세상이었다

 

 

 

 

 

 

전남대 '오월문학상' 詩부문 심사평

<시 심사평 : 시인 김준태>

한국문학 '내일'을 열어갈 유망주로 기대

기대를 가지고 전남대 용봉편집위원회에서 보내온 응모작들을 읽어 내려갔다. 136명의 응모자에 모두 865편의 시작품이었다. 정성을 깃들인 작품들이 꽤 많아 우선 호감이 갔다. 편집위원회에서 알려온 바에 의하면,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오월문학상' 응모대상은 중고등학생에서부터 대학생, 일반인들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신분이나 나이, 직업과는 관계없이 전국의 어느 사람들이나 응모하게 한다는 것이 전남대학교 용봉편집위원회 주관하고 있는 '오월문학상'의 취지라는 것이었다. '용봉문학상'이란 옛날의 이름표를 떼 내고 '오월문학상'이라고 명칭하게된 의도를 짐작할 수가 있어서 한편으론 심사위원을 긴장시켰다.

그러나 1천여 편에 달하는 응모작들 중에서 딱 (이것이다!) 하는 작품이 얼른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군계일학(群鷄一鶴) 그것이 손에 안 잡혔다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로는 전남대가 주관하는 '오월문학상'은 적어도 전국 수준, 나아가 세계적인 수준 그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저 고만고만한 생각, 고만고만한 서정, 고만고만한 사유와 형식에 그쳐 심사위원을 안타깝게 했다. 자고로 '새로운 시'란 기성시인들이 개척해놓은 내용성(혹은 시적 에스프리esprit)과 형식미를 눈치보지 않고 당차게 뛰어넘는, 사물을 보는데 있어서도 타성적·관성적·피상적·상투적·피동적 그것들이 아닌 세계관(혹은 가치관·인생관·역사관·철학관·우주관)과 표현(미학적 측면)을 지양해야 하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한다면 어느 시대에서도 그래왔지만 내일의 한국문학이 요구하는 시인은 무례할 정도로 건방진 그런 시인이어야 하지 않을까. 김수영 시인의 표현을 빌자면 어차피 모든 예술작품은 처음에는 '불온함' 그것이라 하지 않던가. 예컨대 시적 형식과 내용에 있어서 전위적이고 아방가르드적(이것은 무슨 포스트모더니즘 즉 해체주의적이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이어야 한다는 말이 바로 그 말이다. 여과 없이 좇는 모방은 언젠가는 폐기처분될 잉여생산물 그것임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시는 그래서 개혁(reformation)이 아닌 송두리째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는 혁명(revolution)적 발상에서 출발한다!

아무튼 그런 가운데서도 이번 전남대 '오월문학상'에 응모한 작품들은 수준이 대체로 고른 편이었다. 예년 수준 정도였다는 것이다. 심사의 편의상 먼저 A급, B급, C급으로 나눴는데 B급에 오른 작품이 응모작품 3분의 2를 차지했다. 이윽고 A급 수준(물론 상대평가 차원에서)에 오른 응모자 8명의 작품 50여 편을 다시 심사숙고하면서 읽었다(나는 시를 '읽는다'는 말보다는 '음송한다'는 표현을 더 선호한다. 왜냐하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詩-poem-의 어원은 원래가 노래 verse=sing이었기 때문이다). 최종에 오른 작품은 [감포에서 외 4편] [새벽도시 외 3편] [늦잠 외 6편] [겨울막차 외 16편] [홍게 외 4편] [종이컵들 외 8편] [나 외 9편] [의자와 공터 외 14편] 등 그것들이었는데, 이들 작품은 모두 일정 부분 상당한 수준에 오른 가작들이었다. 노력만 한다면 앞으로 보다 더 좋은 시를 써서 문학적 빛을 볼 수 있는 사람들의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남은 작품은 역시 심사할 처음 순간부터 두 눈에 들어왔던 이원석씨의 [나 외 9편]과 김충규씨의 [의자와 공터 외 14편]이었다. 전자는 역사의식과 사회의식 혹은 철학적 사유까지를 겸비한 작품이었으나 미학적 서정(시가 추구하는 궁극적인 특징)이 빠져 있어서 가작으로 했다. 이 점만 보완하면 전자는 한국문단에 소위 독특한 개성을 지닌 시인으로 나서지 않을까 예견해 본다. 결국 [의자와 공터 외 14편]을 응모한 김충규씨가 올해의 '오월문학상' 당선자가 됐다. 시적 기법도 고루 갖췄고 또한 앞서 심사위원이 강조한 '아방가르드적 불온함(이것을 '개성'이라고 말해도 좋다)'이 돋보여서 그의 실력을 예감케 했다. 그의 시편 [폭풍이 오면] [겨울숲에서] [다정한 숲] 중 어느 것을 내밀어도 당선작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모더니티한 작품 [달과 고양이]도 흥미로웠다. 올해 당선자는 문학의 양대 축인 리얼리즘과 로맨티시즘에다 모더니즘(오늘날 이 기법은 아무도 피해 갈 수 없다. 왜냐, 이것이 바로 우리들의 삶 자체마저 지배하고, 갉아먹고 있기 때문이다)까지 아슬아슬 통과해 가고있는 사람으로 생각되었다.

그래서 김충규씨가 응모한 작품들 중 전통적 서정미를 보여주는 작품들은 뒤로 미루고, 좀 설익었지만 [의자와 공터]를 당선작으로 내밀어 올렸다. 앞으로 대성할 것을 믿는다.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하고, 많이 쓰고, 많이 많이 사랑하고, 부지런히 살다보면 '좋은 시'는 당연히 자신의 몸과 영혼 속에서 꽃망울을 터뜨리게 마련일 것이 아닌가. 거듭 건투, 정진을 빈다.

 

 

 

 

사랑

 

 

 

집으로 돌아가는 골목 어귀

누군가 버리고 간 나무판자에 박혀

못은 녹슬어 있었다

세월이 허물어진 자리마다

바람소리만 무성한 판자의 한 귀퉁이에서

지독히 뜨거워져 부끄럽도록 환하게

당신의 몸으로 지고 싶었을까

다시 만나면 당신의 살로

붉게 붉게 피어나려니,

간절히 녹슨 그 붉은 빛으로

지나간 세월보다 더 깊어지고 싶었을까

나뭇결을 따라 비스듬히

붉게 녹슨 못은 이미 알았던 건지도 모른다

숨을 놓아버린 저 판자의 몸이

전생에 꽃을 피우던 한 그루 나무였으며

피우지도 못하고 져버린 꽃의 어린 몸이었음을

그래서 저렇게

나무판자에 새겨진 기억의 결을 따라

지듯이 피어나는 꽃처럼 녹슬어 있는 것이다

녹이 슬어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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