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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상

 

빈 병 / 양근희

 

목 좁은 병 하나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고 있다

채우는 일에 서툴기 짝 없는

저나 나나 꽤 한심한 모양

 

욕심이라도 낼라치면

대번에 목부터 막혀

여린 감성하나도 지나지 못하는

좁아터진 속내

 

고스란히 드러나니

천지에 누구라

오그라진 가슴 속에

꽃불을 채우려 하겠는지

 

나의 하루는

여전히 투명한 빈속이다

보관된 것 없어

꺼내는 일 더더욱 두려워

 

긴장 속에 노을을 삼킨

만취한 시어詩語가

입 크게 벌린 항아리 곁에서

뾰죡 주둥이 내밀고 섰다

 

 

 

 

은상

 

기생 / 김예린

 

나느 불현듯,

내 살속에 당신의 알을 쳐놓습니다.

밥을 먹고, 잠에 들고

 

당신은

떠나가고, 돌아서고

 

마침내 부화한 내 살속에 것들은

그리움 되어 기생합니다.

행여나

눈물로 쏟아내려하지만

그리움도 살아 꿈틀거리는 걸까.

 

소름끼치게 악착같은 원망되어

그저 살라고

그리움,

 

나의 어미 되어 살라고

그리 말해줍니다.

 

 

 

동상

 

슬픈 사랑의 노래 / 김영철

 

찬란한 태양빛은 어디로 가고

짙은 밤      

달빛마저 사라져 없으니

칠흑 같은 공허

내겐 

아무것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가없는 그림자들조차

자신의 영혼을 애달아 하여

치오(恥傲)에 떨고 있던 들

숨은 자의 거룩한 슬픔일랑 보일 리가 있을까?

 

남국의 정열은 힘없이 스러져 가고

목멱산의 목련 같이

진흙 속의 연꽃 같이

애중지한 인간성마저 퇴색되어 버린 채

황량한 거리의 낙엽이 되어

가슴 속에 흩 날린다


싫어지는 나

할 말을 잃어버린 채

그래도 멍청한 여유만이 유일한 낙(樂)인가 싶어


지금은 지상에서 낙원으로 치달려야 할뿐

오롯한 꿈속에서나마 님을 잠재우고

실컷 쳐다보면서


또 하나의 님을 기루어야만 한다



                                                  1984 년 10 월의 마지막 날

                                                  (부제 : 어느 고시생의 비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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