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객 행위 / 김양숙
- 장미
늑대들의 척추에서 원죄가 익어가는 시간
역전 뒷골목으로 숨어들어 스스로 몸에 불을 밝히는 꽃이 있다
몇 번의 건기를 관통하고서야 몸에 핀 꽃이 가시가 된다는 것을 안 사내
가시에 찔린 행성은 전신주에 매달려 밤새 별빛을 토해냈다
꽃송이 대신 마른 눈물이 배달되는 시간
몸에 두른 가시를 열면 쏟아지는 새끼손가락들
“머리 올려 줄게 오빠랑 살자”
“오빠랑 도망가자”
설탕과 분자구조가 같은 말이
켜지 못한 촛불이 되어 유리창살 안에 갇혀있는 저녁
짐승의 피를 깨우는 여자의 웃음이 담장 아래로 쌓였다
물컹거리며 제일 먼저 썩어가는 심장은
사내의 식민지와 여자의 식민지가 만나는 지점
여자가 더듬이를 갖다 대고
사내의 속을 읽어내는 방식을 고집했다
꽃잎은 서서히 낡아가며
열여덟 살의 이력을 한 움큼의 비린내로 뿌렸다
눈물로 정조준 된 사내는 다시 벼랑에서 추락하였다
누군가를 보내고 돌아선 새벽
수명이 다한 피의 비늘들이 떨어져 역전 뒷골목을 구르고
상처에 비린내가 차오르면 장미의 시간에 옹이가 박혔다
헐거워진 창살 사이로 고개를 내민 여자
깨어진 골목 안을 기웃거리는 늑대의 담벼락에
다시 뜨거워진 촉수를 올렸다
스스로의 죄를 창살 밖으로 꺼내놓고 수선 중인 장미
아직도 사내의 식민지일까
[수상소감] 푸른 영혼을 가진 바다가 영원히 기다려 주는 곳
얼마 전 고향에 다녀왔다. 푸른 영혼을 가진 바다가 영원히 기다려 주는 곳. 파도는 팔을 안으로 굽히며 치고 있었다. 하얗게 부서지는 포말은 계속 마을 쪽으로 기어오르고. 마을은 부서진 파도를 다시 바다로 돌려보내곤 하는 광경을 한참 서서 지켜보았다.
타향이라는 단어의 개념조차 낯설어져 버린 도시의 생활에서 늘 혼자가 된 걸 느낀다. 혼자가 된다는 것은 작은 바람에도 흔들린다는 것이다. 현대는 수많은 바람이 존재하는 곳이며, 자의든 타의든 그 바람들과 맞서 싸워야 하는 전쟁터 같은 곳이다. 싸우다 상처를 입기도 하고 상대에게 본의 아니게 상처를 주기도 한다.
이렇듯 현대를 살아내야 한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었다. 두렵거나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나를 붙잡아주는 시는 나에게 뿌리인 것이다. 지치고 힘들 때면 누군가에게 손을 내미는 대신 시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를 위로해주던 나의 졸시가 다른 누군가를 위로해 줄 수 있다는 데 용기를 갖는다.
『시와산문』 작품상을 제정해주신 시와산문사에 감사드립니다. 『시와산문』 애독자 여러분과 졸시를 뽑아주신 심사위원님들 그리고 발행인과 주간에게 감사드립니다. 이상은 앞으로 더 열심히 쓰라는 채찍으로 받아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더 많은 독자들과 소통하고자 노력할 것입니다.
[심사평] 새로운 시법에의 도전
지령 백호를 향해 달려가면서 『시와산문』은 개성을 지니고 새로운 시의 험로를 개척하는 시와 시인을 소개하는데 힘을 기울여 왔다. 이미 여러 매체에서 시행되고 있는 작품상을 굳이 신설해야 하느냐는 내부의 여러 의견이 있었지만, 『시와산문』에 실린 좋은 작품과 시인을 재조명하고 독자들에게 알리는 일이 『시와산문』의 또 하나의 소명임을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이번 제1회 작품상을 선정하면서 내세운 선정기준은 ‘공정성’과 ‘새로운 시법에의 도전의식이 있는가?’였다. ‘공정성’을 담보하기 위하여 일차로 정기구독자 및 운영위원들께서 추천해 주신 작품들을 예심에 올리고 그 작품들 중에서 ‘새로운 시법에의 도전’과 구현에 탁월한 성과를 올린 작품을 최종심에 올려 심도있는 심사를 진행하였다.
그 결과 최종심에 올려진 여러 편의 작품 중에서 김양숙 시인의 시 「호객 행위」를 2016년 『시와산문』이 제정한 제1회 시부문 작품상으로 선정하였다. 5연 26행으로 이루어진 「호객행위」는 현대사회가 안고 있는 여러 문제들, 이를테면 노마드라든가, 성을 둘러싼 젠더의 문제, 더 나아가 익명성에 이르기까지 개인의 고독과 소외를 ‘장미’로 상징화 하면서 이야기 형식의 틀 속에 진술과 묘사의 묘미를 섬세하게 구축하는데 성공하고 있다.
관념(인식의 내용)을 이미지로 재생하는데 있어 중심에 놓인 이야기는 비유가 소멸되고 서술이 늘어나는 함정에 빠지기 쉬운데 「호객행위」는 시의 난삽함을 피하면서도 비극적 삶의 언저리를 증언하고 위무하는 새로운 시법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시인 스스로의 토로처럼 “원초적 슬픔이 발전단계를 거쳐 재탄생되는, 또 다른 나의 독백을 들어주는” 시의 진경을 더욱 깊고 넓게 확산시켜 주기를 바란다.
- 『시와산문』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