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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 / 신경림

 

 

어려서 나는 램프불 밑에서 자랐다.

밤중에 눈을 뜨고 내가 보는 것은

재봉틀을 돌리는 젊은 어머니와

실을 감는 주름진 할머니뿐이었다.

나는 그것이 세상의 전부라고 믿었다.

조금 자라서는 칸델라불 밑에서 놀았다.

밖은 칠흑 같은 어둠

지익지익 소리로 새파란 불꽃을 뿜는 불은

주정하는 험상궂은 금점꾼들과

셈이 늦는다고 몰려와 생떼를 쓰는 그

아내들의 모습만 돋움새겼다.

소년 시절은 전등불 밑에서 보냈다.

가설극장의 화려한 간판과

가겟방의 휘황한 불빛을 보면서

나는 세상이 넓다고 알았다, 그리고

 

나는 대처로 나왔다.

이곳 저곳 떠도는 즐거움도 알았다,

바다를 건너 먼 세상으로 날아도 갔다,

많은 것을 보고 많은 것들 들었다.

하지만 멀리 다닐수록, 많이 보고 들을수록

이상하게도 내 시야는 차츰 좁아져

내 망막에는 마침내

재봉틀을 돌리는 젊은 어머니와

실을 감는 주름진 할머니의

실루엣만 남았다.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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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깨달음 과정 속에 시인의 인생론 함축

 

공초문학상은 등단 20년 이상 되는 시인이 최근 1년 동안 발표한 작품(시 혹은 시집)중 공초 오상순 선생의 문학 정신과 이념에 걸맞는 시를 그 심사대상으로 삼고 있다.

 

심사위원 일동은 각자 후보자 2명씩 천거하여 그 추천의 변과 각 시인들의 특장 등을 논의한 뒤 3명으로 압축된 후보를 대상으로 면밀한 토의과정을 거쳤다. 심사위원 일동은 그간 공초문학상이 한국 시단의 대가급 시인들에게 수여된 점을 주시하는 한편 권위 있는 문학상일수록 중앙문단 중심적으로 운용되고 있다는 점을 적시하면서 지방문단에도 앞으로 넉넉한 관심을 보일 것을 촉구했다.

 

충분한 토의 뒤 심사위원 일동은 저마다 충분한 수상 자격을 갖춘 3명의 후보자를 대상으로 무기명투표를 실시했는데 만장일치로 신경림 시인을 1998년도 제6회 공초문학상 수상자로 선정하게 되었다. 수상작은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동명의 시집이 창작과 비평사에서 지난 3월 간행됨)이다.

 

신경림 시인은 70년대 이후 어두웠던 한국 정치 사회적 현실에 대하여 시종 서정성 짙은 인간주의적 문학사상으로 서민 대중들의 삶을 전통적인 민요 형식의 기법으로 형상화하여 현대 한국 시문학사의 한 흐름을 형성시켰다.

 

특히 이번 수상작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은 시인 자신의 인생 여정이 이라는 이미지의 변모로 축약되어 있는데, “멀리 다닐수록, 많이 보고 느낄수록 / 이상하게도 내 시야는 차츰 좁아져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만 남는다는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을 노래하여 그간 시인의 추구해온 인생론이 미학적으로 절묘하게 진테제로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공초사상이란 무엇일까. 식민지와 분단 시대의 모순과 갈등 속에서 그 지향할 바를 허무혼을 화두로 삼아 암중모색했던 게 아니었을까 생각하면 그 허무혼이 이제 신경림 시인의 인생론과 접점을 이룬다는 게 오늘의 우리 시문학을 위하여 얼마나 큰 축복이겠는가.

 

심사위원 일동은 공초의 문학사상이 신경림 시인의 수상을 계기로 더 큰 지평으로 열릴 것을 기대해 마지않는다.

 

- 심사위원 章湖 李根培 任憲永 宋秀權 李憲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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