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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이월의 교차로 / 한인숙


상여를 보낸다
초겨울. 언 슬픔이 기억의 행렬을 짓고 있다
한 세월 이정표도 없는 길
소리꾼의 요령소리가 산역으로 향하는 몇 구비 능선을 넘어서고
흑백의 한 생이 울음에 섞인다
상여꾼의 후렴소리를 더듬던 누군가
알 수 없는 기억에 찔린 듯 추위 한 자락을 움켜쥐고
한동안은 눈물도 상처도 없는 길이
북망의 깊이를 더듬적거린다

슬픔의 실마리가 풀리고 있다
노잣돈을 뒤척이는 햇빛도
확인되지 않은 소문들도
교차로를 통과시키고서야 안식의 길로 접어들 것이고
인연들 또한 죽음을 통과하고서야 눈물의 깊이를 알 것이다

졸고 있던 새 한마리
꽃상여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았는지 움찔. 날아오른다

 

 

 

 

자작나무에게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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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행간 속속 파고든 그리움

 

올 겨울은 유난히 눈이 많다. 함박눈 속을 한참이고 걸었다. 나를 끌고 가는 상념을 따라. 구름의 방향을 따라 내 안 웃자란 풍경들을 잘라냈다.

 

방금 놓친 생각들 저쪽에서 새 한 마리 낮게 날아올랐다. 시아버님의 상여를 따라나서는 길. 예고 없던 마지막 축제가 진행되었고 한 삶이 죽음에 이르고서야 가벼워지는 길임을….

 

아버님의 마지막 길을 시로 풀어내면서 많은 가슴앓이를 했다. 내 안의 아픔들과 못내 삭여졌을 마음들이 시의 행간과 행간 속속들이 그리움으로 파고들었다.

 

이제 마음속에 집 하나를 마련해놓고 시로 채우려 한다. 현대시가 갖춰야 할 덕목들을 늘 일깨워주시는 박경원 선생님과 함께 시의 주춧돌을 세우고 대들보를 올리려 한다.

 

아직은 서툰 대패질과 못질이 문학의 꽃으로 피어나도록 갈고 다듬을 것이다. 주부문학이 아닌 현대문학의 수사들을 움켜쥐고 지붕도 헤이고 문패도 달면서 서두르지 않는 참 문학의 길을 가고 싶다.

 

이 길에 늘 내 편이 되어준 사랑하는 남편과 가족들 그리고 시원문학. 차령문학 동인들과 문학을 사랑하는 주변 분들께 감사 드립니다.

 

박경원 선생님의 선비정신과 올곧은 문학인으로서의 모습을 존경합니다. 제게 집짓기의 터전을 마련해주신 경남신문과 심사위원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콩나물은 헤비메탈을 좋아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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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죽음 통해 생의 의미 관조

오늘날의 사회는 삶의 효용성을 측량하는 잣대에 의해 시가 거의 강박적으로 배제되고 있는 사회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영화 제목의 표현이라면. ‘죽은 시인의 사회’라고나 할까? 이 같은 사회에서 그래도 아직 시인지망생이 많다는 행복한 아이러니는 한 해의 첫날 지상(紙上)에 장식되는 신춘 등용문을 통해 실로 신선하게 확인되는 것이다. 우리 심사위원은 낱낱의 애착과 열정이 그대로 배어 있는 수많은 작품을 읽은 후 압축된 십수 편의 시를 최종 결선에 올렸다.

‘홍시’. ‘어머니. 사과를 드릴게요’ 등의 시를 보낸 분의 작품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생활 감정의 심연에 숨어있는 미시 담론의 소중한 경험들을 제재로 유연한 흐름의 시상(詩想)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 뚜렷한 장점이었다. 그러나 작품 수준이 전반적으로 고르면서도 돌출성이 없어 아쉬웠다. ‘망치 소리를 기다리며’는 수작의 조건을 갖추었으면서도 다소간 마무리가 덜 된 듯한. 완성도가 떨어지는 듯한 느낌을 떨칠 수가 없어 당선작으로 강하게 밀 수가 없었다. ‘버스정류장’ 등의 시를 보낸 분의 작품 기법은 영상 이미지를 실험적으로 재현하는 것이어서 참신한 느낌을 주었다. 그러나 시가 추구하는 아름다움의 지복(至福)을 기약하기에는 시기상조인 듯하다. 그밖에도 ‘내(內)동 629번지’와 ‘손가락이 그리운 사람들’ 등이 당선작으로 논의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십이월의 교차로’는 죽음의 세계가 비추어낸 일상의 단면을 객관적인 거리에서 담담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는 작품이다. “인연들 또한 죽음을 통과시키고서야 눈물의 깊이를 알 것이다.” 이 잠언적인 표현에서 보듯이. 흑과 백. 기억과 망각. 이승과 저승. 끝내는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경계에서 생의 의미를 탐색하고 있다는 관점에서 볼 때. 그 눈길은 관조의 시선이기도 하다.

시는 대중적으로 읽힐 수 있으면서 내용이 분명하게 자리를 잡고 있어야 한다. 언어의 감각만으로 좋은 시가 되는 것이 아니다. 자기만의 은밀한 세계에 칩거하기보다는. 시란. 공명과 반향이 아니어선 안된다. 이러저러한 맥락에서 ‘십이월의 교차로’를 주저없이 선(選)하는 데. 우리 심사위원들의 의견이 일치했다. 당선자의 건필과 문운을 기원한다.

 

- 심사위원 : 엄국현, 송희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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