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 키, 키, / 한병인
키는 어딘가의 구멍에 꽂힌 채로 계단 하나 정도의 높이에 매달려 있을 것이고
키는 구멍을 통해 안을 들여다보고 구멍 하나의 길이로 밖을 가늠하고 있을 것이라고
나는 오늘이라는 높이에 매달려 있는 작은 새 한 마리를 상상한다
새의 감정은 한사코 키와는 무관한 것이지만 아무래도 구멍을 물고 있는 저 키의 속성이 새의 부리에서 왔다고 나는 생각하는 것이다 키와 새의 부리가 키, 키, 키, 웃음을 만들어낸다 서로 너무 꽉 맞아 떨어지는 속내를 키는 키 만큼의 길이로 유희하고 전유하는 까닭이다 쪼는 저들의 관성에서 부리는 점 점 더 높은 구멍으로 향하고, 그러나 언제고 다시 풀리는 키와 구멍들, 키를 닮은 수많은 부리들이 구멍을 통해 일제히 날아오르는 환상에 갇힌다 허공 어디쯤에서 키, 키, 키, 잠시 웃음을 만들어 낼 때에도 웃음이 울음에서 왔다는 소리의 의혹을 키, 키, 키, 웃음으로 떨쳐버릴 수 있을 것이라고, 키들은 단단한 부리를 부비며 한껏 오므려 보이는 것이다 오늘은 너무 뾰족하게 발음되는 키의 모양새를 제외하면 키, 키, 키, 웃음 몇 개는 여전히 내일에 남겨질 것이고, 키, 키, 키, 더 완벽한 웃음을 위하여 계단을 오를 것이고, 이제는 키, 키, 키, 울음에도 섞이고 키, 키, 키, 조금은 숨죽이다가 키, 키, 키, 낮게 흥얼거리다가 키, 키, 키, 울먹이다가 키, 키, 키, 소리 지르다가... 드디어는
키,
키,
키,
더 깊은 구멍으로, 천천히 내려가는 것이다
[당선소감] 언어가 스스로의 틀 깰 수 있도록 할터
신춘문예 시 당선 소식을 듣고, 기쁨을 전하기 위해 한 남성을 방문하기로 했습니다. 그는 오랜 세월 전문가의 길을 걸어온 터라 자부심과 신념이 단단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아내는 그를 병간호하다가 두 달 전 암 선고를 받고, 갑작스레 먼저 세상을 떠나고 말았지요. 가족들은 그의 건강을 염려해서 아내의 죽음을 알리지 않기로 했습니다. 아내의 존재를 덤덤히 여기던 그가 어느 날 말을 꺼냈어요. “마실 간 너희 엄마는 언제쯤 온다니.” “시골 집이 비어서…화분에 물도 주어야 하고….”
‘이제 당신의 아내는 평생 그녀가 가꾸던 깨밭에 묻혀 있어요.’ 이 말을 그에게 전해야 할 것 같은 의무감에 시달렸습니다. 최소한 그들은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어야 했다고 자책하면서…
그러나 그것은 저의 오만이었습니다. ‘너는 한 편의 시를 그에게 읽어줄 용기조차 없질 않느냐.’ 저는 끝내 그녀의 죽음을 그에게 전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시 당선 소식도 말씀드리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나의 시, 나의 분신 ‘키, 키, 키,’가 웃음 짓는 모양을 아버님의 침상 곁에서 조용히 지켜보아야 했습니다. 웃음이 울음에서 왔다는 소리의 의혹을 키, 키, 키, 웃음으로 떨쳐버릴 수 있을 것이라 믿으면서….
조금은 숨죽이다가 키, 키, 키, 낮게 흥얼거리다가 드디어는 식물성의 언어로 깊은 구멍을 찾아 내려가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여러 모양의 사연 하나 쯤 간직하고 있으므로, 시적 언어가 만들어내는 복층의 향연들에 참여할 수 있는 처지이지요. 시 당선 소감 글을 쓰는 이 시간, 나 자신을 향해 한 구절의 생각을 남겨놓을까 합니다.
‘감각을 투명하게 두어라, 언어가 스스로의 틀을 깰 수 있도록.’
지금까지 한병인의 시 당선 소감문을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시와 사랑과 시적 언어에 대하여 일상의 생각을 전하면서 소감문을 대신하였습니다. 앞으로 더욱 정진하는 모습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새해에도 사랑하는 제 곁의 모든 분들에게 행복과 행운이 가득하시기를 기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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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사유·다양한 시적 구사 위한 궁리 돋보여
1000여 편의 엄청난 응모작 중 최종심에 오른 작품은 임효빈의 ‘나는 언제나 파혼한다’, 김정아의 ‘미라처럼’, 한병인의 ‘키, 키, 키,’ 등 세 편이었다.
‘나는 언제나 파혼한다’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사람을 본 것처럼 ‘빠져드는 시’였다. 익숙한 세계와 시어를 다루지만 ‘다른 것’을 가지고 있는, 일테면 나뭇가지에서 다른 나뭇가지 끝으로 살짝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듯한 시 쓰기가 예쁜 파문을 연속적으로 일으켰다. 어떤 면에선 나무랄 데 없는 시였지만 마찰이나 거슬림이 끼어들 여지가 적어서 주저되었다.
‘미라처럼’은 마른 멸치를 통해 자유에 대한 그리움과 죽음을 겹쳐놓고 거기서 멸치 머리와 배를 따듯이 마지막까지 내줘야 하는 것들을 분해해 내는 솜씨는 분명 큰 덕성이지만, 시가 어떻게 끝날지 훤히 알 수 있다는 점이 아쉬었다.
고민 끝에 ‘키, 키, 키,’를 당선작으로 민 이유는 앞의 두 시편보다 철이 덜 든 언어의 맛, 그리고 사유와 다양한 시적 구사를 적용해 보려는 궁리가 투고된 전체 시 가운데 가장 돋보인 때문이다. 특히 몇 줄쯤 없어도 좋을 느슨해진 뒷부분의 동어반복이 자꾸 마음에 쓰였지만, 전반적으로 그의 시적인 촉수가 민감하다는 것을 믿었다.
키는 키 너머에서 무언가를 발생시키기 위해 공을 들인다. 키는 “구멍에 꽂힌 채로” 몸을 한 번 바꾼 다음 “오늘의 높이에 매달려 있는 작은 새 한 마리”가 된다. 이제 하나이면서 둘인 ‘키’는 비웃음 같은 “웃음을 만들어”내기도 하고, “더 높은 구멍으로 향하고”, 그리고 “환상에 갇힌다”. 그러나 종국에는 “더 깊은 구멍으로” 떨어져 내려야만 한다. 그런 나락이 음울하지 않고 경직되어 있지 않은 점이 그의 시의 장점이다.
키는 매달려 있지만 일이 있고, 새의 부리는 다물리고 아프지만, 날개가 있다. 인생은 고달프고 몸은 무겁지만 너와 나, 혹은 두 세계를 잇는 통로라 할 법한 ‘흥얼거림’이나 ‘울먹임’이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의 시가 그런 흥얼거림이나 울먹임으로 살짝살짝 날개를 들어올리며 공중으로 나아가는 그런 시였으면 좋겠다.
누군가 좋은 시가 아닌데 좋은 시처럼 보이려는 것을 독자는 제일 싫어한다라는 말을 했다. 한병인씨를 시단에 내보내면서 시간이 흐른 후 그가 좋은 시인이라는 것이 확인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은 선자(選者)의 기도와도 같다. 당선을 축하드린다.
한가지 기록해 두고 싶은 것은 열세 살 어린이 김한희가 응모한 사실이다. 그 시들이 흐뭇한 미소를 짓게 했다. 무럭무럭 크고 점점 나아질 것이니 많이 읽고 많이 쓰기를 부탁한다.
심사위원 황학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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