둥근잎꿩의비름* 외 4편 / 김은자
움켜잡은 손에서 총소리가 들린다 창칼에 쫓겨 낭떠러지에 몸을 던진 여자 죽은 뿌리에 걸려 바위틈 몇 알의 흙을 부여잡은 여자 수직으로 날이 선 채 과부처럼 살아온 여자의 살결에서 살의가 빛나고 있다 사람들은 그것을 실족이라 했지만 엄연한 개화였다 은장도를 가슴에 품고 산 맨발을 보아라 흙을 딛지 못하면 살 수 없어 비탈에 집을 지었다 얼마나 많은 바람을 끌어안아야 했을까? 꽃잎이 어긋나 있는 것을 보니 수천 번 엇갈린 것이 분명하다 계곡의 습기를 모아 터지는 눈망울 마주나거나 돌려 난 녹백색 잎에서 밥 짓는 냄새가 난다 산비탈 아래 마을의 반짝이는 불빛이 진홍색 눈물처럼 짙다 아찔하면서도 고혹적인 자태 절벽 위를 날던 새가 둥근 저녁을 편다.
* 산비탈 바위틈에서 자라는 돌나물과에 속한 여러 해 살이 풀의 이름
폐염전
무너진 서른세 번째 소금창고가 그녀였다는 것을
마을 사람들은 모른다
무거운 도시를 이고 풀썩 주저앉은
케케묵은 소금집이 애를 순산하고도 버림받은
소래 여인이었다는 것을 세상은 알지 못한다
풍경을 위해 이목구비를 지운 여자
풀숲으로 돌아가는 저녁이면
머리 위로 흰뺨검둥오리 날아오른다
바람만은 지우지 못하고 떠난 그녀,
번제를 위한 그녀만의 방식이었으리라
쓰러진 소금창고 정지된 시간 위에
여체는 광물처럼 누워있다
촛농처럼 녹아내린 발가락들이 바다로 쓸려갈 때마다
염전이었던 방은 파도소리를 토해 놓는다
축적된 것들이 소금처럼 고요한데
시체 한 구가 민물에 밀려갔다 밀려온다
습지의 갈대들은 느리게 돌아가는
무성필름처럼 동작과 대사가 맞지 않는다
과거를 알아듣는 사람은 없다
염부들이 팔뚝에 불뚝 솟은 힘줄 같은 전설을
말없이 바닷물에 밀어 넣는 밤
백야(白夜)다,
스러진 것들이 경계를 허물며 갈대숲을 피워 올리는 하얀 밤
소금창고 지붕이 바람에 휘날린다
오래 잊고 살았다
소금창고 양철지붕 위에 떨어지던 빗방울 소리를
비무장지대처럼 살다 바람이 된 갯골 여자를
화장
관이 불 속으로 들어가자 나는
죽을힘을 다해 엄마를 불렀다
안 보이는 영토가 썰물처럼 밀려들어 갔다
조금씩 어두워지면서 천착되어가는 시간의 무늬들이
탯줄이 끊긴 갓 태어난 아기처럼 오열했다
엄마와 나는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다
‘엄마, 편히 쉬세요’
엄마는 평소 화장을 지우던 저녁처럼
수건을 머리에 쓰고 불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화장을 지우러 가는 거란다’
무거운 옷을 벗고 속뼈까지 태워달라는 엄마
흐린 날이면 하늘을 힘차게 날아가는
갈매기 눈썹 그려 넣었던 시절이 엄마에게도 있었다
슬픔과 웃음을 섞어 견고한 입술을 찍으며 살았던 시간
엄마의 귀는 접혔다가 펴지는 우산 같아
토란잎처럼 젖지 않았다
엄마의 유골이 담긴 항아리를 받아 쥐고 알았다
한 움큼의 웃음, 한 움큼의 울음, 한 움큼의 엄마
자리를 비운 사이 창 밖에는 겨울이 오고 있지만
하얀 맨발 엄마가 지금도 따스하다
버려진 집
버려진 것들은 구멍으로 살신하는 근성이 있다
구멍은 퇴화되어 바람으로 부활하는 마력이 있다
남겨진 것들은 모두 저 혼자 쓰러진 것들
혼자 우는 사이 구멍이 되고,
구멍이 통로가 되어 문으로 변한 것들이다
빈 창살이 바람과 몸을 섞어 부재가 되었다
행간마다 숨결을 놓지 않은 까닭이다
고독이 짐승처럼 뛰쳐나와 깨진 창문
버림받은 것들은 안으로 소리를 품고 있다
기울어진 빛들이 벽으로 위태롭게 쏟아진다
방목된 것들이 기원 속으로 스며드는 저녁
빛바랜 페인트가 몸을 추스르고 앉은 노파의 등처럼
허물어진 지붕 위로 쿨럭 쿨럭 마른기침이 새어나가고
침묵하던 것들이 흐르기 시작한다
떠돌던 새가 돌아올 징조다
이제 바람 소리를 기록하던 것들이 귀화하리라
마른 골격위에 별들이 휘추리처럼 매달려 있다
바람은 길게 누운 몇 세기전의 계절을 접신한다
방울을 세게 흔들며 버려진 자가 버린 자를 부르는 밤
한 뼘 열린 뒷문으로 스무 평 남짓 전답이 바다 같다
동태
동태가 생태보다 무서운 것은
토막 난 몸으로도 눈을 뜨고 있다는 사실이다
조문객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사후의 눈
내 살 누가 파먹나 사력을 다해 노려본다는 것이다
핏발이 선 눈빛에 말없이 수저를 놓는다
용서 같기도 하고 포기 같기도 한 눈빛이
내공처럼 탱탱한 울음을 채워 넣고 있다
흐릿한 기억으로 생을 감당할 수 없었기에
꽝꽝 얼도록 시력은 흔들리지 않는다
살이 달콤할수록 등골이 오싹해진다
썩은 동태 눈깔이라고 누가 비웃었던가?
동태 눈깔 파먹는 재미 쏠쏠하다고 입을 모으는 저녁
시선은 골격을 허물지 않는다
남은 한 점의 살점까지 지켜본 뒤 버려지리라
지느러미 불태우고 내장이 뿌려지도록
마르지 않는 눈길이여
동태가 보고 있는 것은 허공이 아니다
마지막까지 쏘아보는 냉혈의 눈동자
[당선소감]
친정어머님을 떠나보낸 지난여름 이후 얼마간 말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시를 쓰지 못했습니다. 숨을 거두시는 마지막 순간조차 곁에서 지켜보지 못한 딸로서 나 같은 사람도 시를 쓸 자격이 있는 것인가 한동안 먹먹하고 혼란스러웠습니다.
결핍의 연속이었던 이방에서의 시쓰기는 나의 시가 지금 어디쯤 가고 있는지 알수없어 더욱 고독한 행진이었습니다. 의식 속에서 발효된 모국어가 이질 문화속에서 둥둥 떠다니는것 같은 날이면 그 모든것들이 고이지 않고 흘렀으면 좋겠다고 생각 했습니다. 흐르다가 작은 돌뿌리 옆이라도 소신있게 피었으면 좋겠다고 꿈을 꾸었습니다.
뉴욕은 이번 겨울 유난히도 눈이 많이 내렸습니다. 추위를 견디느라 가시같이 변해버린 뒷 숲의 나무들을 보면서 잎이 피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깊어졌을 무렵 당선 소식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창밖을 보니 가시같던 나무가지에 어느새 봉우리들이 환하게 매달려 있었습니다.
부족한 시를 뽑아주시고 세워주신 심사위원님들께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한국문학방송에도 고마움을 전합니다. 초심으로 돌아가 떨리는 마음으로 시에 정진하겠습니다. 나의 시 쓰기에 묵묵히 뒤에서 응원해 준 가족들과 '붉은 작업실' 문학교실 문하생 여러분께 기쁨을 나누어 드립니다.
■ 심사경위
올해로 일곱 번째인 한국문학방송 신춘문예. 이번 응모자는 400명을 웃돌았다. 예심에서 8인의 작품 40편(응모자별 5편)을 선하였고, 그 40편에 대해 각각 응모자 인적사항(성명, 연락처 등) 모두를 완전히 삭제한 다음 무작위로 불규칙하게(뒤섞어) 편철했다. 그 후 곧바로 본심으로 넘겼다. 본심은 채점이 종결될 때까지는 심사위원끼리도 누구인지, 몇 명인지 알 수가 없도록 보안을 유지했다. 또한 집계(평정)된 점수에 대해 각 심사위원이 당선자 결정을 인준할 때까지도 심사위원이 누구인지 응모자가 누구인지 밝히지 않았다. 심사위원 전원이 당선자를 인준한 후에야 심사위원과 당선자 및 본선진출자들을 각 심사위원에게 공개하는 방식으로 진행했다. 이렇듯 한국문학방송의 당선자 결정방식은 심사위원간 작품추천 및 토론 형식이 아닌 것이다.
채점 기준은 시행 첫회부터 올해까지 한결같은 기준이 적용됐으며, 각 작품별로 △문법 · 어법 · 표현의 적절성(15점) △주제와 내용의 부합 · 일관성(20점) △감동 · 느낌(20점) △시적구조와 메타포의 깊이(20점) △작품의 신선감 · 독창성(20점) △작가적 역량 · 성장가능성(5점) 등 총 100점 만점으로 되는 구조다. 당선자 선정 기준은 각 심사위원별로 각 작품 또는 다섯 작품 모두의 합계점에서 차하(상위 점수를 장원, 준장원, 차상, 차하로 구분) 이상을 받은 사람 중 전체 총점이 최고인 사람이 당선되는 기준으로 평정이 됐다. 이번 당선자는 그 요건을 모두 충족하였으며, 총점에서 최고를 기록함은 물론, 그 이전에 심사위원 모두로부터 차하 이상을 득점한 유일한 사람이다.
한국문학방송 신춘문예 응모 자격은 기성작가(시인)와 문인(시인)지망생(문학도)을 가리지 않으며(남녀노소ㆍ국적 불문, 누구나 응모 가능) 신인등용문 성격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기성작가(시인)에게 주어지는 재평가의 한 방편에 더 가깝다고 이해하는 것이 좋겠다. 신인등용문은 한국문학방송 신춘문예가 아니라도, 국내에만도 3백여 개나 된다는 문예지와 중앙 및 지방 일간지(신문) 등 수없이 많다.
한국문학방송 신춘문예에는 해마다 응모자 중 상당수가 기성작가(시인)로 파악되고 있으며 아직까지 그 벽을 넘은 문학도(미등단 신인)는 없었다.
심사위원은 해마다 전원 교체 위촉함을 원칙으로 하는데, 이번 본심은 정일남 시인, 쾨펠연숙 시인, 서상규 시인, 조영민 시인이, 예심은 안재동 시인(한국문학방송 주간)이 맡았다.
올해도 당선작에 대한 작품평은 별도로 내지 않기로 한다. 한국문학방송의 신춘문예는 타 신춘문예나 문예지 등과 '차별성(개성)'을 매번 추구한다. 그래서 심사방식도 채점제인 것이다. 본선진출자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도 인비(人秘)키로 한다. 본선진출자나 낙선자 모두의 사기를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끝으로, 이번 신춘공모에 참여해 주신 모든 응모자 제위께 진심 어린 큰 감사와 아울러 아쉽게도 낙선된 분들께는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전한다.
― 정리: 안재동 시인(한국문학방송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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