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로호의 파랑물 / 이병일
처음엔 나도 은빛 금빛 테를 두른 물금이었다고 한다. 나는 둥근 것들 속엔 장엄한 힘이 들어있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방울방울 피는 공기방울소리로 빚어진 검은 수달이었으니, 무사의 칼만큼 화평한 해질녘의 수면을 더 좋아했다
파로호 전체가 꽃병으로 둥글어질 때였다. 나는 수면 위로 파문을 긋는 물갈퀴의 촉을 생각한다. 나를 깨울까 말까 하는 양수: 물비늘의 꿈을 떠올린다. 그때마다 나는 곡옥모양 물오리 발자국이 갈대숲에 드는 시간을 감지하게 되었다
파로호에는 발설되지 않은 수달의 사원이 있었다고 한다 버들치 꼬리에서 튀는 잔광들이 웅숭깊어진 시간, 나는 입안에 든 황복 뼈 몇 점에 목을 졸리기도 했다. 그러나 황쏘가리 눈알을 빼먹는 걸 편애한 나는, 그날그날 잠재운 물금이 넘치는 새벽에 태어났다고 한다
오늘도 나는 수평선이 언제 일월성신을 잠재우는지, 어느 순간 물고기가 물너울에 가슴 베이며 죽는지, 그 경계의 작은 평화에 대하여 생각한다. 나는 파로호를 지키기 위해 파랑물이 되었다. 저만치 나보다 한 뼘 웃자란 물수리가 공중에서 물속 세상의 나를 물위로 낚아 챌 때였다
[당선소감]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별빛에 묻어 빛나는 시월입니다. 고산지대부터 단풍이 내려오는 소리가 들립니다. 이런 날에는 연필심이 저절로 시를 부릅니다. 제가 쓰는 시는 생태학 상상력으로 이뤄진 것들이 많습니다. 이 세계 속에서 같이 공존하고 살아가는 생명들은 작고 하찮은 것들이지만, 그들의 운명을 엿보고, 그들의 삶을 예감할 때, 저는 경이로움을 새삼스럽게 느끼곤 합니다. 제 1회 평택 생태시문학상 수상작으로 결정되었다는 소식을 받고, 저는 다시 한 번 충만한 생명의 세계를 열어 보일까 합니다.
오늘도 저 지평선 너머엔 어떤 생명들이 살고 있을까 생각해봅니다. 그런 예기치 않는 풍경들의 너머를 꿰뚫어보고, 생명이 약동하는 그 찰나의 시간을 움켜쥐는 시인이 되겠습니다.
제 부족한 작품을 당선작으로 선고해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이 기쁨을 꽃다발로 엮어 사랑하는 나의 아내 이소연과 아들 이서진에게 바칩니다. 고맙습니다.
[심사평] 생태환경을 둘러싸고 있는‘원형’과 ‘직선’의 투쟁사
이병일 시인의 세계를 향한 사유(思惟)의 흐름은 심오(深奧)하다. 화자의 내면 깊숙한 곳에 자리한 존재에 대한 인식의 전제는 ‘둥근 것들 속엔 장엄한 힘이 있다’이다. 둥근 것은 원형(圓形)이자 원(元)형(亨)이며 원(元)형(亨)이(利)정(貞)이며 사계절의 순환(循環) 사이클이다. 곧 순리요 화평이며 화평은 평화다. 진정한 무사의 칼은 평화를 지키는 데 있다는 인식이다.
원형의 파로호 호수는 평화다. 그런데 그 평화를 깨뜨리는 것은 수직의 직선들이다. 수직의 직선들이 평화로운 둥근 원형을 파괴하다. 원형은 둥글다. 둥근 것은 장엄한 힘이 있다. 장엄함은 비장함이다. 이는 푸른 생명성을 간직하여 온유함을 지향하며 끝없이 새로운 평화의 지평을 열어가고자 하는 열망이다. 원형 속에 꿈틀거리는 메시지는 자연의 환경이요 생산의 근원인 모태성인 것이다.
반면에 직선은 동적이다. 둥근 원형을 향해 돌진하여 그것을 파괴한다. 냉혹하다. 전투적이다. 이 직선은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문명성을 상징한다. 생명과 평화의 기치를 숨기고 자연환경을 여지없이 공격하여 자신의 존재를 과시한다. 이러한 잔혹한 자연생태계질서의 파괴, 무질서, 혼란 등 그 투쟁의 현장에서 화자는 약자(弱者)이자 선(善)한 자의 편에서 물수리로 상징되는 강자(强者)의 공격을 온몸으로 저항하는 평화주의자, 박애주위자의 숭고한 최후를 보여줘 숙연함을 느끼게 한다.
이병일시인은 관념적 철학적 사유와 비견할 만한 문학 사상(思想)의 깊이를 가지고 있다. 생태시에 대한 한 차원 높은 고귀한 인식론적 철학적 가치를 구현시켰다고 하겠다.
이번에 당선된 「파로호의 파랑물」을 포함해 허인혜 시인의 「녹조」, 정미경 시인의 「물소 우는 소리」작품들은 인간에 의한 자연환경 파괴, 인간에 의한 사회 환경 유린, 인간에 의한 인간 존엄성 상실 상황에서 제생태계 질서 회복을 제시한 탁월한 작품들이었다고 평가하며 제1회 『평택 생태시 문학상』 심사평을 가름하고자 한다.
- 심사위원 : 김영자. 배두순. 이귀선. 이태동. 진춘석. 한인숙
'국내 문학상 > 평택생태시문학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6회 평택 생태시문학상 / 조우리 (0) | 2018.07.08 |
---|---|
제5회 평택 생태시문학상 / 유종인 (0) | 2017.07.03 |
제4회 평택 생태시문학상 / 이병철 (0) | 2017.07.03 |
제3회 평택 생태시문학상 / 서상규 (0) | 2015.09.26 |
제2회 평택 생태시문학상 / 김민철, 김완수, 하수현 (0) | 2015.09.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