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꺼운 부재(不在) / 추프랑카
안 오던 비가 뜰층계에도 온다 그녀가 마늘을 깐다 여섯 쪽 마늘에 가랑비
육손이 그녀가 손가락 다섯 개에 오리발가락 하나를 까면 다섯 쪽 마늘은 쓰리고, 오그라져 붙은 마늘 한 쪽에 맺히는 빗방울, 오리발가락 다섯 개에 손가락 하나를 까면 바람비는 뜰층계에 양서류처럼 뛰어내리고, 타일과 타일 사이 당신 낯빛 닮은 바랜 시멘트, 그녀가 한사코 층계에 앉아 발끝을 오므리고 마늘을 깐다
매운 하늘을 휘젓는 비의 꼬리
마늘을 깐다 한 줌의 깊이에 씨를 묻고, 알뿌리 키우던 마늘밭에서 흙 탈탈 털어낸, 당신 없는 뜰층계에서 통증의 꼬리 하나씩 눈을 뜨며 낱낱이 톨 쪼개고 나와야 할 마늘쪽들, 층계 갈라진 틈 틈으로 촘촘하게 내리는 비, 집어넣는 비, 비의 꼬리도 꿰맬 듯 웅크려 앉아 그녀가 마늘을 깐다. 묵은 마늘껍질처럼 벗겨져, 하얗게, 날아가 버리는 맨종아리의 육남매 비안에 스며 있는 그늘의 표정으로 여섯 해, 꿈속 수면에 번지던 당신 뜰층계에 불쑥 붐비는 당신의 이름, 아멘 아멘 아멘 마늘은 여섯 쪽이고 육손이 그녀 뒤뚱거리며, 오리발가락 여섯 개에 손가락 여섯 개를 깐다
세 시에 한번 멎었다가 생각난 듯 쿵, 쿵 아멘을 들이받으며 아직 다 닳지 않은 비가, 다시 여러 가닥으로 쪼개진다
[당선소감] "시가 있어 힘든 세상 견뎌…도움 주신 분께 감사"
시가 있어, 세상으로부터 제게 주어진 힘에 겨운 것들을 견뎌낼 수 있었습니다.
눈을 맞습니다. 몸 밖으로 내리는 눈이 나뭇가지와 마당과 지붕에 쌓입니다.
내 몸 밖의 쓸쓸한 거처들에 저처럼 희게 내려앉아 몇 날이고 마음 나눌 수 있는 시의 온기를 가지고 싶었습니다.
당선 소식을 받고 엄마, 큰언니, 큰 형부… 무엇과도 대신할 수 없었던 것들을 제게 주고 떠난 이름을 다시 천천히 새겨봅니다.
오랜 기간 혼자 공부하며 최선을 다해 시를 읽었고 열심히 시를 생각했습니다.
습작 초기, 칭찬과 채찍을 아끼지 않으시던 대구작가콜로퀴엄 박재열 교수님, 박미영 선생님께 먼저 감사드립니다. 교수님의 사정으로 여섯 달밖에 누릴 수 없었던 열정적이었던 교실이 늘 아쉬움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막바지에 만났던 동리목월문예창작대학 손진은'구광렬 교수님, 값진 가르침 고맙습니다. 늘 설레던 경주로의 길이었습니다. 문우들, 함께한 시간 행복했습니다.
아직 부족한 제게 시를 나눌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신 매일신문사와 심사를 맡아주신 장석주 선생님, 장옥관 선생님께 마음을 다해 감사드립니다.
공부밖에 모르던 아내를 위해 많은 것을 준 남편, 오래 망설이며 미뤄왔던 등단을 이제 합니다. 이 여정에서 잘 지내겠습니다.
수산아 항아야, 오늘도 서로 응원하며 받은 것들 열심히 누리며 살자.
[심사평] 모호한 화법이지만 '여섯' 리듬의 변주 뛰어나
책으로 묶인 예심 통과 작을 읽으며 시의 균질화 현상에 잠시 당황했다. 하나의 예로, 세계를 '책'으로 펼치고, 일상을 '열람'하며, 물의 '문장'으로 바꾸는 환유(換喩)들은 범상한 재능으로 상투형에 가까운 것이다.
한 교재로 시를 배운 게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다. '시적인 것'에 갇히면 '날것의 감각'과 낡은 작법(作法)을 깨고 부수는 신인의 예기(銳氣)를 드러내기 힘들다. 스무 명의 본심 대상작들 중에서 1차로 고른 것은 송현숙, 이도형, 김재희, 박윤우, 김종숙, 김서림, 추프랑카 등 여섯 분의 시다. 이 중에서 송현숙의 '박스를 접다', 이도형의 '구름을 통과한 검은 새의 벼락', 김종숙의 '파'를 눈여겨보았으나 상상력의 발랄함과 시적 갱신의 정도가 모자라다고 판단했다. 최종적으로 김서림의 '사해문서 외전(外傳)'과 추프랑카의 '두꺼운 부재(不在)'가 당선을 겨루었다. 김서림은 시를 빚는 조형력과 언어 구사가 좋았다. "물속에 파종된 햇빛" "달의 뒤꿈치에서 하얀 밤이 돋는다" "슬픈 거미들은 죽음의 전언을 행으로 옮긴다" 같이 의미를 감각화 하는 시구들은 반짝이지만, 낯익은 발상과 기성(旣成)의 영향이 어른거리는 것은 흠이다. '날것의 감각'이 미흡하다는 방증이다.
추프랑카의 '두꺼운 부재(不在)'는 모호하고 화법(話法)이 낯설지만, 우리는 그 낯섦을 '날것의 감각'으로 이해했다. 여섯 쪽 마늘, 육손이, 여섯 해, 육 남매 등에서 '여섯'은 잉여고, 덧나고 아픈 상처다. 시인은 상처를 화석화하고 정적인 것으로 소모하지 않는다. 이 특이점은 까고, 벗기고, 날아가고, 스미고, 붐비고, 들이받고, 쪼개지고… 등등 다양한 움직씨 활용으로 나타난다. '여섯'은 여러 가닥으로 쪼개지고 끝내 셀 수 없는 빗줄기로 전화(轉化)한다. '여섯'을 리듬에 실어 여러 겹의 의미로 변주하는 솜씨가 대단하다. 두 심사자는 추프랑카의 '두꺼운 부재(不在)'의 낯섦이 다른 응모자들이 보여주지 못한 시적 새로움의 징후라고 판단하면서 기쁘게 당선작에 올렸다.
심사위원 장석주(시인), 장옥관(계명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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