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강 / 최영숙
장독대 옆에 살던 뱀은 산으로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나무는 허술해져 경계처럼 빗금을 긋는다
저렇게 주먹 불끈 쥐고 가는 길
너를 향해 가는 고추 벌레 구멍 같은 길
툭 부러지고 싶다 이제 그만 자리 잡고
눕고 싶은 생각
생각은 자면서도 깨어 있을까
꿈틀 나의 손을 치우는 돌서덜
그 돌서덜 위에서
숲은 작은 몸을 하고 툰드라의 바람으로 운다.
[당선소감] 비탈길 눈 녹듯 한 우물 판 지 15년 만에 기쁨 만끽
올겨울은 유난히 춥다. 그러나 오늘은 눈이 녹아 내린다. 처마 밑에 서서 손을 내밀어 본다. 목숨 사라지는 것들은 모두 21g의 무게가 줄어든다 한다. 한 방울의 몸, 차고 가볍다. 응달의 눈은 여전히 녹지 않는다.
눈을 치우며 보니 내가 다니는 곳만 눈이 두께로 앉아 있다. 이 넓은 세상에 소심한 나의 발자국이 어둑어둑 보인다.
어두워지도록 눈을 치우고 있는데 당선 소식이 왔다. 일시에 얼었던 몸이 쫙 녹아내리는 듯, 불꽃으로 타오른다.
너무 기뻤다. 이 길에 들어선 지 어언 15년 만의 기쁨이다. 한 우물을 파면 이런 날이 오는구나!
몸은 어느새 하늘로 둥둥 떠 찬 비탈길 눈을 다 녹인다. 이 길을 걷는데 가끔 발목을 걸던 남편에게도, 그리고 늘 힘을 실어 준 나의 아이들과, 한림대학교 평생교육원 문예창작반 교수님과 교우들, 빛글문학 동인들, 홍천문협회원님들과 함께 이 기쁨을 나누고 싶다. 부족한 제 글을 뽑아 주신 심사위원님들께 감사, 또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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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군더더기 없이 행간의 여백 만드는 솜씨 탁월
예심을 거쳐 올라온 작품들은 일정한 수준을 상회했고 개성적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시조의 경우, 시와 시조가 한 자리에서 경합한다는 점에서 불리함에도 불구하고 매년 응모작이 늘고 있어 반가웠다. 그러나 시조의 율격을 준수하지 못한 경우와 시적 언술에 미치지 못하거나 진부한 소재와 발상을 보여 아쉬웠다.
시의 경우, 좋은 작품이 많아 즐거운 고민을 하는 가운데 의구심도 있었다. 새로운 독법을 요구하는 듯 보이는 낯설게하기가 지나친 기교주의로 흐른다는 느낌. 비틀리고 장황한 언술들을 독자가 어떻게 이해하고 공감, 공명할 수 있을까. 이러한 문제점을 극복하고 최종에 오른 작품은 `적멸보궁', `디딤돌이 있는 풍경', `모서리의 비밀', `상강'이었다. `적멸보궁'은 사유의 깊이와 묘사력이 돋보였으나 참신성과 독창성이 부족했다. `디딤돌이 있는 풍경'은 한 폭의 동화를 보는 듯 시상이 맑고 깨끗하게 다가왔으나 시는 사상과 형식의 등가물이란 점에서 볼 때 내면적 깊이가 약했고, `모서리의 비밀'은 전체를 견인하는 결미의 주제의식이 부족했다. 최종적으로 최영숙의 `상강'은 기교주의에 빠지지 않은 가운데 산뜻하게 응축된 시상이 참신하고 진정성을 겸비한 작품으로 다가와 당선작으로 올렸다. 상강 절기의 자연이법을 선명한 이미지로 포착하면서 고도의 상상력과 직관으로 군더더기 없이 행간의 여백을 만드는 솜씨가 탁월했다. 함께 응모한 `풍장' 역시 절제된 비유와 표현으로 깊은 인상을 주었다. 영예의 당선자에게 힘찬 박수를 보내며 시인으로서 대성하길 축원 드린다.
- 심사위원 : 이영춘·홍성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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