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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면 / 오정순

 


막, 죽음을 넘어선 지점을 감추려
서둘러 흰 천으로 덮어놓고 있던 익사자
최초의 조문이 빙 둘러서 있다

발을 덮지 않는 것은 죽은 자의 상징일까
얼굴은 다 덮고 발을 내놓고 있다
다 끌어올려도 꼭 모자라는 내력이 있다

태어날 때 가장 늦게 나온 발
저 맨발은 결국 물을 밟지 못하고 미끄러졌다
복사기처럼 훑던 흰 천
끝내 남은 미련을 뚝 끊듯 발목에 걸쳐져 있는 체면
가시밭길을 걷고 있거나
아니면 용케 빠져나와 눈밭을 지났거나
물길을 걷다가 수습되어 왔을 것이다

발은 죽어서도 끊임없이 걷고 있어 덮지 않는 것일까
만약에 발까지 덮어놓았다면
자루이거나 작은 목선 한 척이었을 것이다
경계는 저 물 속이 아닌
신발을 가지런히 벗어둔 곳인지 모른다

발이 나와 있으므로 익사자다
고통도 화장도 다 지워진 얼굴은
체면이 없다
누군가 흰 천을 끌어당겨 체면을 덮어준 것이다

 

 

 

 

우주가 들어있는 작은 공을 찾는다

 

nefing.com

 

 

 

[당선소감]  "시는 벅찬 동행이자 선물"

 

친구와 며칠 전에 본 영화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결코 거창하거나 화려하지 않은 세계관이 던진 메시지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일상이 마법이 되는 순간을 부러워하고 있을 즈음, 마법처럼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당선 통보였습니다. 삶의 단면에 몇 번은 마법과도 같은 기적이 끼어드는가 봅니다.


제게 아주 오래된 시간의 흔적이 있습니다. 이십대에 칠 년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썼던 일곱 권의 일기장입니다. 누군가 그랬지요. 뭔가 해낼 거라고. 그러나 특별하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저 문학이라는 마법에 걸렸을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대학 3학년 때 당선된 대학 문학상은 영원히 마법에서 헤어나지 못할 거라는 더 강한 주문이었습니다. 오히려 나태해져가는 일상을 깨운 것은 바닥에 납죽 엎드려 무릎을 꿇은 채로 시를 썼던 백일장이었습니다. 시를 향한 저의 최초의 경배이자 초심이기도 하지요.


시는 벅찬 동행이었고 선물이었습니다. 또 나를 기다리는 시, 통증의 두께와 깊이밖에 내세울 게 없지만 더 세게 끌어안겠습니다.


작년에 경남신문 최종심에 올랐습니다. 올해, 제게 주신 당선의 영광이 누군가에게 용기와 도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부모님과 남편과 두 아들, 두목회 동인, 이재무 선생님과 손광성 선생님, 선희 언니와 김주, 신공나라 문우들.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작품을 선해주신 심사위원님과 경남신문에 허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겸허와 초심을 잊지 않겠습니다. 하나님께 모든 영광 드립니다.

 

 

 

 

[심사평] "인식의 힘 보여준 세심한 관찰"

 

응모작들은 대부분 일상성에 주목하고 있었다. 생활에 밀착하면서도 소통과 공감에 주력하는 시들이 많았다. 일상의 소소한 문제들을 내면화하여 구체적인 실감을 전달한다는 점에서는 의미가 있겠으나 타인의 삶과 사회적 문제들에 대한 고민이 결여된 점은 아쉬웠다는 것이 심사자들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다양한 분야와 계층의 사람들이 투고하는 것이 신춘문예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들 응모작들을 통해 우리 시대의 흐름을 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완성도와 신인으로서의 새로움, 진지하면서도 노력의 흔적이 엿보이는 작품을 선택하자는 합의를 거쳐 이서빈, 문민철, 오서윤 씨의 작품을 최종심에 올렸다.

이서빈 씨의 뒤집기는 유비적인 상상력을 사용하여 아이의 첫 뒤집기와 노모의 화투패 뒤집기를 겹쳐 놓음으로써 탄생과 소멸이 둘이 아니라 하나임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유비적 상상력이 주는 단순함을 넘어서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문민철 씨 작품의 경우 거침 없는 화법이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시간과 기억의 문제를 자신만의 문체로 이끌어가는 힘도 좋았다. 신인다운 패기가 큰 장점이었지만 전체적인 완성도가 떨어진다는 것이 흠이었다.

심사자들은 어떤 이견도 없이 오서윤 씨의 작품을 당선작으로 선택하였다. 오서윤 씨는 세심한 관찰력을 통해 사물을 새롭게 바라보는 인식의 힘을 보여주었다. 간결한 문체를 사용하고 시의 호흡을 잘 조절하고 있다는 점도 좋은 평가를 받았다. 당선작 ‘체면’은 익사자를 덮은 흰 천에서 삐져나온 발을 통해 삶과 죽음, 인간의 문제를 존재론적으로 다룬 작품이다. ‘태어날 때 가장 늦게 나온 발’을 통해 시간과 공간을 가로질러 가고 있으며, 발의 드러냄과 감춤이 인간의 근본적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는 인식을 통해 몸과 삶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드는 시이다. 고통스럽지만 기쁜, 이중적이고 역설적인 시의 길에 들어선 것을 축하드리며 한국 시단을 빛낼 소중한 시인이 되시길 바란다.

 

 

- 심사위원 : 최영철 배한봉 장만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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