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차 / 심상숙
환한 덧니가 영정을 물고 있다
부음은 여태 기다리고 있었구나
이곳은 생각보다 따뜻하다
혜화동 대학병원 장례식장 한 밤의 보일러 굉음이 블랙홀이다
한꺼번에 몰려드는 눈발, 국밥 말아먹듯 휩쓸려간다
눈 덮인 교복과 찹쌀떡 모판을 방 윗목에 세워 두고
모나미 볼펜과 파카 만년필 좌판 그리고 문구 캐비닛
끝내 가보지 못한 장학생 대학 합격증을 끌어안고,
영정 속 덧니는, 네모 속으로 문상객이 내어 준 사각의 추억을 끌어 들인다
종로에서, 덕수궁에서 우리 한 번 마주 친 적 있을까
흰 국화꽃 대궁 끝에 떨어질 듯 매달린 저 눈빛
아직도 인연이 남았는지 팽팽하다
단단한 잇몸 뚫고 좋은 내색이듯 빛나는 뻐드렁 덧니, 누군들 함부로 웃지 못한다 알 굵은 사과나 날 고구마
를 통째로 베어 물어 아귀 귀신 달래듯 자리를 내어 줄 뿐이다
막차 전철도 끊어져 눈 쌓이는 저녁
총알택시 대신
대학병원 아무 집 영정 앞 뜨신 바닥에 덧니로,
앉혔다가 꼭두새벽 일어서는 자리
[당선소감] 삶과 정면으로 마주쳐 살며 읽고 또 읽겠다
눈이 내립니다. 애기동지 짧은 해가 저물었습니다. 뜻밖의 당선소식을 받습니다. 담담합니다. 한 때 당선이라는 흔들림보다, 에밀리 디킨슨의 서랍 속으로 깊숙이 원고를 밀어 넣는 일도 좋겠습니다.
문득 떠 오른 생각하나, ‘더 잘 살아야겠구나’ 더 사랑했어야 했습니다. 귀담아 들어주고 함께 만나 담소를 나누었어야 했습니다. 시간을 파는 가게를 찾던 나, 나는 이제부터 나의 시간을 파는 가게를 차려야 합니다. 타고난 시인도 아닌 내가, 책을 읽고 쓰고 수없이 들여다봐야 하는, 시를 쓴다는 일은 발가락 닳는 노정입니다.
눈이 내립니다. 창밖으로 눈이 쌓입니다. 아파트 터를 닦느라고 앞산을 퍼내었습니다. 헐어낸 비닐공장 돌 자갈 위로, 흔들리던 개 망초 꽃무더기와 칡꽃 향기, 뱀 구멍 위로 눈이 쌓입니다. 저 멀리 피어나는 산마을 불빛을 지우고 눈이 쌓여갑니다. 산이 솟아있던 자리, 새로 생겨난 공중으로 눈이 날립니다. 햇살이 창槍을 던져 처음의 공중을 관통할 때, 허허로운 한 생이 태어날 것입니다. 허공은 투명한 어둠으로 무수한 눈발을 열어주고 있습니다. 나는 새로 생겨난 허공의 웅얼거리는 소리 껴안으며 비로소 내가 됩니다. 골짜기 눈바람으로 숨이 찬 그가 내게로 환히 다가오기에 나는 있는 것 입이다. 산 너머 하늘이었다가 맑은 밖이 되었다가.
부족한 저의 글을 눈여겨 들어주신 광남일보 심사위원님! 고맙습니다.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삶을 성찰해가는 보다 깊은 사유를 길어올려 보겠다고, 그러기 위해서 나의 삶과 정면으로 마주쳐 살며 읽고 또 읽겠습니다.
‘시는 자신의 잿더미에서 다시 태어나 조금 전 자신으로 무한히 되돌아가도록 창조되어 있다’는 폴 발레리의 담론처럼 시인은 느낌을 전달해 줄 뿐입니다. 영감靈感, 그것은 독자에게 속하며 독자를 위해 예비 된 것입니다.
얼음장을 내려치는 도끼날 끝으로 전해오는 찡한 떨림, 그 떨림을 나누렵니다. 강물은 왜 흘러야하는 것인지, 뒤에 있는 높은 산은 왜 앞에 있는 산보다 더 낮아 보이는 것인지, 궁금한 시를 쓰겠습니다. 백년, 이백년 후 과학으로 반드시 증명될 우주 한 구석의 작은 비밀을 발견 하여 그 느낌을 전달할 것입니다.
몇 년 사이, 내가 시를 써 보겠다고 나서면서 부터 만난 사람들, 그들은 아름다웠습니다. 꼭 시를 쓰지 않더라도 시詩 이상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또한 많았습니다.
내가 만난, 내가 아는 모든 분들께 감사말씀 전해드립니다.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가르쳐 주시고 응원해 주셨던 일, 결코 잊지 않습니다. 목사님이 심방 오셨을 때 ‘제 딸이 무슨 일로 그렇게 골몰한지 잘 모르지만 하나님이 도와 달라’고 기도하는 구순 어머니, 언제라도 나를 믿고 지지해주는 남편, 그리고 아들, 딸의 가족 모두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합니다. 뭔지는 모르지만 지켜보며 기다려 주어서 참으로 편안하고 든든한 둔덕이었습니다. 사랑합니다.
[심사평] 일상성 속에서 덧니가 새로움을 물었다
천여 편의 투고작을 읽으면서 들었던 첫 번째 생각은 전국 어디나 할 것 없이 신춘문예 투고작들의 수준이 일정한 수준에는 올라있다는 것이었다. 이미 기성이라고 해도 하나도 문제 될 것 없는 작품들이 꽤 많았던 것이다. 이런 현상은 전국 각지에서 시창작 수업이 진행되고 있고, 그곳에서 수학한 이들이 문단에 등용하고자 응모하기 때문일 것이다.
응모자들의 주소지도 일정 지역에 한정되어 있지 않는 것도 특징이다. 광남일보가 광주전남을 토대로 하고 있는 지역지임에도 불구하고, 응모자들의 주소지는 대부분 서울경기이거나 부산 경남 제주도를 가리지 않았다. 인구에 비례해서 응모자들의 주소지가 분포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는 시인이 되고자 하는 이들은 전국의 어느 일간지의 신춘문예가 되었건 가리지 않고 있다는 것을 추측 가능하게 한다.
응모작도 상당하였고, 그 수준도 시적으로 일정한 경지를 구축하고 있는 것은 긍정적인 면이었다. 하지만 여러 투고작들에서 보이는 특징 중 하나가, 시어의 운용에는 그럴 듯한 경지를 보여주면서도 문장의 근본인 띄어쓰기에 서툴거나 문법적 결함을 보인다는 점이다. 기본기가 안 되어 있으면서 시적인 언술을 익히는 연습에만 매달렸기에 그런 웃지도 못할 일이 벌어진 것일 게다.
시는 언어의 예술이다. 시적 언어가 맞춤법에 무조건 복종하라는 말은 의미가 없는 것이지만, 맞춤법도 모르고 시를 쓰는 것은 사상누각에 불과하다. 아무리 치장을 잘 하더라도 본바탕이 형편없다면, 순간의 치장이 벗겨진 후의 모습만 더 흉측할 뿐이다.
투고작들은 대체로 시대의식이나 거대 담론을 말하지 않았다. 언어 실험을 통한 언어 너머를 탐구한 작품도 별로 없었다. 리얼리티를 통해 현실을 묘사하거나 인간의 삶을 깊이 있게 탐구한 작품도 눈에 띄지 않았다. 시 속에는 삶의 모습마저도 풍경으로 머물고 있었다. 견자의 시각이라고 해야 할 정도로 대상과의 거리가 일정한 시편들이 대부분이었다. 설령 시적 화자가 그 풍경 속에 있을 때도 ‘바라보는 자’의 시선만 남아 있었다. 삶이나 풍경에 투신하거나 그곳에서 뒤섞여 있지는 않았다는 말이다.
최종적으로 고민했던 작품은 6명의 작품이었다. ‘섬에서 작약을 줍다’, ‘촛불’, ‘동백꽃 여관’, ‘첫차’, ‘매생이국을 끓이다’, ‘사과의 형식’ 등이었다. 먼저 ‘사과의 형식’은 대상을 보는 시각에 개성이 있다. 또 시를 끌어가는 방법도 알고 있다. 하지만 그 개성이 시의 완결에까지는 이르지 못하였다. ‘섬에서 작약을 줍다’와 ‘동백꽃 여관’은 글을 오래 써본 사람의 솜씨이다. 그러나 시와 산문의 경계에 대해 고민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아무리 좋은 산문도 시가 되지 못하는 이유는 언어의 밀도에 있다. 또한 시어와 시어가 만났을 때 화학반응이 일어나야 한다. 일상어와 시어의 차이이다. ‘촛불’은 감정을 객관화하는 능력이 좋다. 생각이 깊다. 그러나 시는 감정의 해설이 아니다. 이미지를 통해 그것을 보여주는 노력이 필요해 보인다.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첫차’와 ‘매생이 국을 끓이다’였다. 두 작품 모두, 시작을 낯설기 하기 기법을 사용하였다. 독자의 시선을 끈다. 메타포에도 능하다. 두 사람에게 남은 문제는 한 두 작품을 제외하고는 개성적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문학적 수련을 더 정직하게 한 이는 ‘매생이 국을 끓이다’의 투고자고, ‘첫차’의 투고자는 전체적인 투고작이 한 사람의 것인지 의심이 가기도 하였다. 즉 사유의 자기화와 표현방법의 체화가 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첫차’를 당선작으로 뽑는다. 자기의 모든 작품에 애정을 갖기보다는 자기 작품에서 어떤 작품이 더 나은가를 분별하는 것도 시인이 갖추어야 할 능력이다. ‘덧니가 새해를 물었다.’ 긍정의 요소를 바탕으로 하나의 개성을 이루길 기대해 본다.
심사위원 이대흠(시인 ·천관문학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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