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오고 이팝꽃이 떨어지고 진흙이 흘러내리고 / 지연
무덤 자리에 기둥을 세운 집이라 했다
비가 오고 이팝꽃이 떨어지고 진흙이 흘러내리고
나는 당장 갈 곳이 없었으므로
무너진 방을 가로질러 뒤안으로 갔다
항아리 하나가 떠난 자들의 공명통이 되어 여울을 만들고 있었다
관 자리에 몸을 누이고 잠을 청하던 일가는 어디로 갔을까?
한때 그들은 지붕을 얹어준 죽은 자를 위해
피붙이 제삿날에 밥 한 그릇 항아리 위에 올려놓았을 것도 같고
그 밥 그릇 위에 달빛 한 송이 앉았을 것도 같은데
지금은 항아리 혼자 구멍 뚫려
떨어지는 빗방울의 무게만큼
물을 조용히 흘러 보내고 있었다
산자와 죽은 자의 눈물이
하나가 되어 떠나는 것 같았다 어디를 가든
이 세상에 무덤 아닌 곳 없고
집 아닌 곳 없을지도
항아리 눈을 쓰다듬으려는 순간
이팝꽃이 내 어깨에 한 송이 툭 떨어졌다
붉은머리오목눈이 후두둑 그 집을 뛰쳐나갔다
비가 오는 날 내 방에 누우면
집이기도 하고
무덤이기도 해서
내 마음은 빈집
항아리 위에 정화수를 올려놓는다
[당선소감] 질긴 가죽 같은 시를 쓰고 싶었다
가죽을 자른다. 재단 칼을 잡고 힘주어 긋는다. 가죽에 물 분무기를 뿌린다. 물분무기를 뿌리는 것은 죽은 소에게 허락을 구하는 일이다. 잉크가 나오지 않는 볼펜으로 가죽에 그림을 그린다. 아이들은 아직 오지 않았다. 질긴 가죽 같은 시를 쓰고 싶었다. 아이들도 시도 세월의 손때가 묻어서 물빛이 나면 좋겠다.
내 마음을 붙들고 있는 낡고 허름한 것들 아직 뻣뻣하다. 가죽에 그린 소쿠리, 채반, 절구, 옹기 위에 염료를 바른다. 둥글게 가장자리부터 굴린다. 색이 빠지면서 다른 색을 껴안는다. 시도 삶도 그럴 것이다. 언제 들어왔는지 아이들이 우당탕 배고프다고 냉장고를 덜컹거린다. 엄마가 되고 보니 배고프다는 말이 사랑스럽다.
부모님이 생각난다. 짝재기 신발을 신고 다니시며 나중에 내 자식 크면 호강할 날 있을 거라며 웃으시던 어머니, 자전거 뒷자리에 나를 태우고 마실 다니셨던 아버지, 한 번도 호강시켜드리지 못했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당신의 배보다 자식의 배를 사랑해주신 부모님께 감사함을 전합니다. 병원에 누워 계시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으신 시어머니 김정애 님 고맙습니다. 창문 너머로 어머니 손을 흔드실 때마다 마음이 뻐근하였습니다.
시의 순정으로 인도해주신 김동수 교수님, 시의 가죽에 십자 모양으로 바늘을 꽂아야 함을 느끼게 해주신 문신 선생님 감사합니다. 어둠을 함께 두드렸던 글벗 식구들, 소심한 마음을 다독여주는 시산맥 식구들 감사합니다. 작고 낮은 곳에 더 낮게 엎드리는 남편과 아이들에게 사랑을 전합니다.
마지막으로 부족한 시를 잡아주신 무등일보와 심사위원님 감사합니다. 질기고 철없는 마음을 망치로 두드리며 시를 쓰겠습니다. 머리가 아둔하여 할 수 있는 일은 열심뿐이니 열심히 걷겠습니다.
[심사평] 죽은 자와 산자의 공명통인 항아리 참신
우선, 왜 아직도 시가 쓰이는지 다시 확인했다. 쓰라리고 고통스러운 삶에도 그 속에는 사람들의 온기가 스며있다. 그 온기는 다시 사람으로서 주어진 생을 살아가게 하는 어떤 의지 같은 것으로 전환된다.
사람답게 살도록 하는 그 어떤 의지 중에 시를 쓰는 것이 한 자리 차지한다면 지나친 의미 부여일까. 고통스런 세상이지만 생의 의미를 탐색하고 자신을 위로하며 수많은 다름과 연대하게하는 공감감정의 지렛대로서 시 쓰기가 작동하고 있음에 마음이 뻐근했다.
꽤 많은 작품이 투고되기도 하였지만 작품마다 순순히 넘어가기가 수월치 않았다. 한 이미지가 눈길을 사로잡아서 오래 만지작거리기도 하였고 삶의 연륜이 묻어나는 작품에서는 그냥 한 권의 작품집으로 직접 상재하는 것도 좋았겠다는 느낌에 생각이 머물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타자와 관계하면서 생기는 불화와 불온의 서정에 더 주목하고자 하였다. 개인의 내면으로 침잠하여 이해불가의 관념세계에 갇히기보다는 연약하더라도 괴물 같은 세계와 대결하는 소통적 공감 서정이 아직도 시를 써야 할 이유가 아니겠는가에 천착하였다.
최종적으로 다섯 분의 작품을 놓고 고심하였다.
유쾌하고 명랑하며 웃음을 선사하는 시는 절로 즐겁다. ‘포장마차 왕국’은 작은 동네에서도 사람의 품격이 어느 정도가 되어야 대통령 노릇을 할 수 있는지를 전하는 소식에 읽는 이를 즐겁게 한다. 그러나 너무 익숙한 소식이다. 빅뉴스는 아니더라도 새로운 소식에 가슴이 울렁거리는 기쁨을 자아내기에는 부족했다.
‘꽃피는 콤바인’이 전하는 즐거움도 작지 않다. 힘들고 피곤한 농사일을 거뜬히 해내는 콤바인은 참으로 귀한 존재이다. 콤바인은 온갖 꽃들을 이미 내장하고 있다. 농사일의 일상을 ‘꽃피는 콤바인’으로 소소하게 관찰하게 하는 여유로움이 묻어난다.
그런데 아쉽게도 꽃을 피우는 콤바인만 덩그렇다. 시가 읽는 이로 하여금 감정이입을 촉발시켜 작품 속의 위치에 서서 동일과 동등으로 느끼고 바라보게 하는 진경이라고 한다면 콤바인은 그냥 콤바인일 따름이었다.
‘비가 오고 이팝꽃이 떨어지고 진흙이 흘러내리고’는 죽은 자와 산 자들 사이는 물론, 떠난 자와 남아있는(새로 들게 된)자들의 공명통인 ‘항아리’가 참신하다.
어떻게든 살아남은 자들은 그가 거처할(하는) 집이 과거와 현재를 잇는 공간이며 미래의 누군가의 집이기도 할 것이기 때문에 가득 채워놓으면 안된다. ‘빈집’이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공명통을 울게 해야 한다. 거기에서 꽃이 지고 새가 날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비가 오고 이팝꽃이 떨어지”는 때 “진흙이 흘러내리”는 집을 찾아서 “항아리” 하나가 “공명통”으로 집의 내력을 이야기하고 있는 “빈집”에 가보고 싶은데 “정한수” 보다는 술 한 잔 괴어 놓고 귀 기울이다가 그 공명통을 박살 내버리는 것은 어떨까. 정답 같은 마무리가 아쉽다는 얘기이다.
두 분의 작품이 더 있었다. 그러나 논외로 하였다. 이미 자신의 작품 세계를 구축해가고 있는 분들의 작품이라 여겼다. 그 분들의 문단 이력에 굳이 무등일보 신춘문예 당선이라는 한 줄을 더 써넣게 해야 할 이유가 없다고 판단했다.
‘비가 오고 이팝꽃들이 떨어지고 진흙이 흘러내리고’를 당선작으로 내민다. 이미지의 참신함에 사회적 성찰을 적극화하여 내적으로 단단한 시의 집을 지어나갈 것을 사족으로 붙인다
심사위원 조진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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