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도 / 조율
옥탑방 평상에 앉아 수박에 칼을 찔러 넣는다
수박의 적도 부근쯤이다 지구본으로 따진다면
한 중앙에 위치한 에콰도르의 어느 도시 정도가 되겠지
이곳은 뜨거운 열대우림, 곰팡이가 타잔처럼 천장을
오르는 옥탑방, 생각한다, 왜 나에게는 선글라스를 끼고
일광욕을 즐기는, 그런 적도가 지나가지 않는가?
눅눅한 근로계약서에 손가락을 빌려줄 때마다
낮은 태양이 양철지붕 위로 더 무겁게 녹아 내려붙는다
가로줄이 많은, 빈칸이 많은, 적도가 많은
주름진 종이 속에는 엷은 비늘이 숨어 있다
적도를 벗어난 열대어의 서글픈 눈망울이 끔뻑인다
온통 경력자들만의 구인광고 박스, 열대성 기후 속에서
적도는 옆구리 뜨거운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
지구의 허리춤을 적도가 점점 조이고, 조여 오면
이거 벨트에 구멍을 하나 더 뚫어야 하나?
난간에 서서 입안에서 우물거리던 수박씨를 뱉는다
내가 맞히지 못한 뒤통수들은 달동네에 엉킨 오르막길을
왜 이렇게 가뿐히 풀어내는가? 수박씨 속에도 적도가
있다던데 그곳은 영영 바람 한 점 없단 말인가?
이천 원짜리 금간 수박에서, 무너진 신발장
경첩과 경첩 사이에서, 경력과 초보사이에서 도려낸 적도,
언제나 남은 절반은 절반을 닮아간다
바지랑대를 세워 하늘을 갈라본 적도,
구름을 베어본 적도, 적도 부근에 가본 적도 없지만
바람 잘 날만 있는 이곳은 언제나 바싹 말라가는 무풍지대,
[당선소감] "세상의 절반을 가득 울리는 시"
저는 구름을 뜯어먹어 본 적도, 남들 다 가는 그 흔한 시집을 가본 적도 없습니다. 쓰고 또 쓰느라 나를 읽어볼 새 없이 꼬박 서른을 채웠습니다. 이제, 저는 골목을 읽고 당신의 옆모습을 읽고 당신의 잘려나간 바짓단을 읽겠습니다.
2012년 겨울, 저는 꿈속에서 방석과 방석 사이에 '햄버거 패티'처럼 쑤셔진 뱀을 보았습니다. 좋은 소식이 있을 거라는 주변의 이야기를 잊어갈 무렵 당선 통보를 받았습니다. 한 남자를 잠시 생각하느라, 혹은 저울질하느라 머리가 아팠습니다.
그럴 땐 달달한 것이 좋아 신기하게도 제주도 감귤 초콜릿을 먹고 싶다고 이야기를 한 다음 날, 당선 소식이 왔습니다.
이제껏 시를 쓰며 시집갈 밑천은 없고 시집만 많은 별 볼 일 없는 여자가 될 뻔한 저에게 이렇게 시집이 많은 이유를 주신 심사위원 선생님, 감사합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나의 어머니, 그리고 얼마 전 밥은 해먹을 줄 아느냐며 칠 년 만에 꿈속에 나타나 걱정하던 아버지, 그리고 하나뿐인 남동생이 정말 기뻐할 것 같습니다. 학창시절 함께 공부했던 우석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분과동아리 '시륜' 동인들과 교수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지금은 무너진 삼례역의 무지개, 온천은 없는데 온천역만 남은 신길온천역 찢어질 듯 붉은 서쪽 하늘, 안양시 귀인동 922번지 옥상, 역곡역 하늘을 쓰는 이름 모를 나무에게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언제나 세상의 남은 절반이 되어 남은 절반은 가득 울리는 시를 쓰겠습니다.
[심사평] 가볍지 않은 삶의 무게 녹아들어
누군가 혼신을 드러낸 작품에 대하여, 타인이 전혀 다른 주관적 잣대로 평가하는 일은 조심스러운 일일 수밖에 없다. 작품을 읽기 전에 작품 속의 사람을 읽어야 하며, 그가 겪은 체험의 변용을 진지하게 탐색해야 한다는 것. 그러므로 이러한 일에는 책임이 따른다. 나는 그 책임을 가능한 한 무겁게 지기 위해, 그리하여 그 결과를 즐겁게 받아들이기 위해 노력하였다.
최종심은 '안정적인 작품을 가려낼 것인가, 불안정한 작품을 한 번 믿어볼 것인가'라는 두 가지 화두의 팽팽한 갈등 속에 이뤄졌다. 예심을 거쳐 최종심에 올라온 작품은 송지은의 '마늘밭 유훈2', 문귀숙의 '어탁', 강동완의 '눈먼 꽃', 조율의 '적도' 등 모두 4편이었다.
'마늘밭 유훈2'와 '어탁'의 장점은 안정감이었다. 주제가 따뜻하고 형식적인 면에서도 꽤 숙련된 솜씨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 안정감은 익숙한 리듬과 익숙한 시 전개 방식이라는 측면에서 진부함을 느끼게 하였다. 반면 '눈먼 꽃'은 지나치게 수다스러웠다. 행의 길이도 길어서 산문시의 느낌을 주었는데, 다행히 문장에서만은 성실함이 엿보였다. 그의 성실성을 향해, 수다스러울수록 명료하게 견지해야 하는 것들에 대해 숙고하기를 당부하고 싶다.
고심 끝에 당선작으로 고른 작품은 조율의 '적도'이다. 이 작품은 앞서 언급한 '불안정한 작품'의 경우이다. 그런데도 이 작품을 선택한 것은, 최종심에 오른 작품들 중 가장 불안정하지만 가장 매력적인 가능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무거움과 가벼움의 산뜻한 교차와 조화, 그 속에 투영된 결코 가볍지 않은 삶의 무게가 시의 불안정함을 상쇄해 주었다.
불필요한 사족, 남발되는 의문사는 물론, 행구분도 그리 전략적이거나 타당성 있어 보이진 않았다. 그러나 눅눅한 근로계약서와 달동네를 읽어내는 그의 '옥탑방 평상의 꿈'을 믿어보기로 했다. 그의 시는 가볍다. 그러나 단지 가볍지만은 않다. 차별화된 가벼움을 그의 장점으로 승화시켜 나갈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심사위원 김규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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