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상] 논을 빨래하는 시간 / 김민철
어린 벼가 여전히 대소변을 가리지 못한 것일까
벼의 아랫도리에 잡초가
얼룩처럼 누렇게 묻어 있다
그때 우렁이는 세재 가루가 되어 논을 빤다
빨판으로 반점이 생긴 잎을 꾹꾹 누르고 펴고
소용돌이를 닮은 껍질로 물을 돌리고
가장자리에서 잠시 숨을 고른다
아직은 아이처럼 햇살과 놀기 좋아하는
벼의 목덜미에 남은 땀 냄새를 맡았을까
물에서 막 피어난 잡초줄기마저 세척하여
어둠조차 푸르게 만드는 우렁이,
오늘도 벼는 매일매일 깨끗한 빛깔을 입고
논물 위에서 살랑살랑 뛰어노는데
종종 하루 종일 빨래가 쌓이는 시간이 싫었다
새똥이 가슴팍에 붙어 떨어지지 않고
먹구름이 손발까지 검게 물들면
고무장갑과 앞치마를 벗어 던지고
우렁이는 논두렁 밖으로 나가 울고 싶을 때가 있었다
그러나 허리 근육이 얇은 할머니를 생각하며
갈비뼈 하나를 잃은 할아버지를 생각하며
우렁이는 온몸을 적시며 기어이 빨래를 끝낸다
못줄의 간격을 기억하고 있는 벼들이
뽀송뽀송한 갈색 옷으로 갈아입을 채비를 한다.
[우수상] 제비 떠난 뒤 / 김완수
회로처럼 뒤엉킨 도시 한 귀퉁이에 새들이 세 들어 살기 시작했다 눈길도 들어가기 빠듯한 초가(草家)에 한 쌍의 새는 찢긴 꽁지들을 다 들여놓지 못했다 집주인의 완고한 눈길은 임대차 계약처럼 강퍅했겠지 간신히 노숙의 한시름을 놓은 집 제비들은 헐거운 현실에서 퍼덕거리며 여름 한철 공중에 얹혀살았다 공동(共同)의 사각(死角)에서 모성을 품고 집주인의 푸대접도 품은 새들 어린것들은 젖은 날개를 접을 새 없던 어미 가슴을 연방 후벼 팠고 가파른 비행(飛行)에서 막 돌아온 아비는 어린것들에게 약자의 처세를 가르쳤다 가끔씩 들리는 악다구니로 초가에 금이 갈수록 어미와 아비는 헤뜨며 서럽게 부둥켰다 그러던 새들이 소리 없이 짐을 쌌다 집 턱밑까지 차오르던 텃세에 한 어린것이 추락하고 난 뒤 잠깐 풍장을 치르던 새들은 오던 길로 망명하듯 날아갔다 어쩌면 예정된 수순이었을지 모르나 천적의 마음까지 품으려 한 순례였기에 나는 이르게 떠난 새들의 빈자리가 눈에 밟혔다 다시는 못 볼 것 같아 켕기는 객식구 마음이었을까 나는 이제야 폐가처럼 퇴락해 가는 집 아래에 빗더서서 새들이 저릿하게 갔을 길을 따라가 본다 공한지 같은 하늘엔 지상(地上)의 전세난을 비웃듯 구름 한 점 끼어 있지 않다 새들 삶이 무단 철거된 지 막막한 시간 계약 기간이 한참 남았어도 새들이 미련 없이 훌쩍 떠난 집엔 사람들 허세만 거미줄처럼 잔뜩 뒤엉켜 있는데
[가작] 붉은 사슴들이 숲의 심장으로 뛰어들고 / 하수현
─ 환상의 숲
1
숲속을 휘돌고 있는 파르스름한 기운에 대해 숲 아래 사람들은 잘 모른답니다 붉은 사슴들이 숲의 심장으로 소리 없이 뛰어들고 나무집 뒤 물푸레나무들 사이로 은밀한 바람이 드는 걸 그대 아시나요
숲속에 작은 초록빛 연못이 생긴 건 오래된 일이지요 연못 언저리에 튼실한 부들들이 초병(哨兵)처럼 항시 서 있고 어디에선가 끊임없이 피어나는 수상한 안개행렬은 스스로 백발(白髮)을 풀어 주변을 감싸준답니다
나를 에워싸고 있는 알 수 없는 힘 때문에 나는 이 건강한 나무들의 세상 안에서 세상의 모든 기억을 잠시만 잊어 두기로 한답니다 잊으면 절대 안 되는 것들이라며 늘 손에 꼭 쥐고 있던 것들도 어차피 이 숲에 들면 나도 모르게 다 잊어버리고 말아요
그러니 한번 생각해 보세요,
도대체 숲속에서 무엇이
견고한 진리가 될 수 있겠어요
2
이 숲을 아는 사람들이 노란 수선화를 숲속에서 몰래 키우는 일과, 청춘의 나비들이 주변을 이미 점령하고 있는 걸 나는 다 알고 있지요 숲을 찾아오는 사람들은 숲이 안고 있는 어떤 신비와 비밀들에 대해 너무 신경 쓸 필요는 없답니다
숲길을 걷고 있는 당신을
끝없는 황홀경에 빠지게 하는 일도
그 책임은 오로지
처음부터 이 숲에 있답니다
환상의 숲이여, 안일한 내 일상을 보거든 언제든지 나를 깨워주어요 잠자고 있는 내 꿈을 보거든, 날개 접은 벌레마냥 내가 움츠린 때를 보거든 나를 무조건 흔들어 주어요 숲에서 숨 쉬고 있는 새벽이슬이여, 여름안개를 탄 채 항시 내 영혼을 주시하는, 살아 있는 숲의 눈동자여.
[심사평] “자연은 자연을 치유하는 공존의 생태계 원리의 핵심”
평택 생태시 문학상에서 세운 심사기준은 ‘인간에 의한 자연환경 파괴, 인간에 의한 사회 환경 유린, 인간에 의한 인간 존엄성 상실’ 상황에서 제생태계 질서 회복입니다. 우리의 목적은 위기의 생태환경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세상을 향해 고발하고 비판하여 우리사회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하며 살아있는 시인의 소리를 세상 사람들이 경청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데 그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심사요령은 사회에 문제 상황을 던지고 불평등질서에 대한 사회적 고발과 회복을 위한 노력, 제생태계 질서회복을 제시한 우수한 작품에 점수를 더 주었습니다. 모두 310분이 응모하였으며 총 작품 수는 2170편이었습니다.
먼저 대상을 수상한 김민철 시인의 <논을 빨래하는 시간>은 낯설기 기법을 구사하여 생태계의 문제 상황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그 문제 상황이란 자극을 통하여 자연치유로 회생(回生)되어가는 과정인데 이를 잘 보여준 작품으로 평가할만합니다. 어린 아기로 치환된 ‘벼’, 우리의 오염된 생태환경인 ‘논’, 논에서 벼가 건강한 생명을 가지고 생장하려면 반드시 중간자의 헌신이 필요함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 중간자가 바로 ‘우렁이’입니다. 우렁이의 알레고리는 자연을 치유하는 ‘자연’입니다. 그것이 바로 자연의 본성임을 상기시키고 우리가 이와 같은 본성을 회복하지 못한다면 자연은 인간에 의해 무너질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지금 농촌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허리근육이 얇은 할머니’들과 ‘갈비뼈 하나를 잃은 할아버지’들입니다. 그들의 고달픈 농촌 지키기 여정은 우리 현대인들의 미래를 보여주는 ‘시놉시스’입니다. 논의 중간자인 우렁이, 사회로 말하면 중산층. 김민철 당선자는 이들의 건강성이 우리의 자연과 사회 생태계질서를 유지시키는 중핵이 됨을 은근히 시사하고 있습니다.
자연생태의 순환도 사회생태와 직간접적으로 관련됩니다. 우수상을 수상한 김완수 시인의 <제비 떠난 뒤>도 무너져 내리는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이란 문제를 고발하고 있습니다. 사회도 무질서와 혼돈적인 카오스에 휘말리면 붕괴되기 마련입니다. 이를 바로잡을 수 있는 것은 역시 건강한 중간자들의 헌신입니다. 기득권자를 대표하는 텃새들. 그들의 횡포를 극복하는 제비부모들의 절박한 행동은 바로 우리 사회 어둑한 부분을 시놉시스로 차용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 사회의 중추기능을 하고 있는 중산층들이 어느 사이 붕괴되어 경제적 궁핍한 좌표로 옮겨갔을 때 조화로운 사회, 살맛나는 사회의 온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세상을 궁지에 몰아넣는 허세들만 도처에 거미줄처럼 뒤엉켜있을 것이란 끔직한 경고를 보내고 있습니다.
가작을 수상한 하수현의 <붉은 사슴들의 숲의 심장으로 뛰어들고-환상의 숲>은 자극을 통한 회복을 형상화하고 있습니다. <붉은 사슴들과 숲은 심장>에서 심장 그 자체는 그 생명체를 존재하게 하는 중심이기 때문에 결코 무너질 수 없습니다. ‘심장’이 무너지면 그 생명체는 삶을 종언하고 맙니다. 병이 들어간다는 것은 심장 그 자체가 고장이 난 것이 아니라 그 주변을 감싸고 있는 기관들의 고장인 것입니다. 관상동맥 혹은 협심증 등인데, 바로 이들로 치환된 은유가 ‘붉은 사슴들’로 그려져 있습니다. 이들은 숲의 건강성을 유지하게 하는 경락이며 혈 자리이고 생로(生路)이면서 동시에 병로(病路)입니다. 여기에 자극을 주면 다시 말해 붉은 사슴들이 건강하게 숲에서 뛰어논다면 숲의 심장은 계속하여 펌프질을 할 것이고 혈액을 각 기관 및 실핏줄까지 골고루 보낼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생태계의 건강한 순환논리입니다. 이 순리의 주관자는 우리에게 영혼을 공급하는 살아있는 ‘숲은 눈동자’입니다. 그것은 살아있는 영원한 초월자를 은유하기도 합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자연과 사회 생태환경의 구심점을 확실히 인식한다면 우리는 건강한 삶을 영위할 것이라고 시인은 희망적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 심사위원: 이귀선, 진춘석, 김영자, 배두순, 이태동, 한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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