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상] 나무 아래서 / 임하혁(임세한)
아버지는 죽어서도 여전히 키 큰 나무다
피가 돌지 않는 아랫도리는 썩고
그 곳으로 벌레들이 몰려와 집을 짓지만
아버지는 한 번도 고통을 호소한 적이 없다
가지마다 연둣빛 자식들을 올망졸망 매달고
크고 탐스러운 열매들을 키워내는 가을이면
아버지는, 한 그루 풍성한 세상의 나무였다
그러던 나무가 갑자기 잎을 떨궈버렸다
바지런히 물 뽑아 올리던 뿌리도 말라버리고
햇빛 맘껏 끌어당기던 연둣빛 눈들이
시들시들 땅으로 떨어져 내린 것이다
바람 많은 세상의 무수한 죽음 중에서
모든 소임을 다하고 눈을 감은 아버지
그 성스런 최후가 무척 평온한 듯 보였다
아버지를 닮은 것이 소원이지만
나는 안다, 아버지의 행적을 따라가자면
비바람 모진 세월 오래 견뎌야 한다는 것을
그러나 내가 짓는 집들은 너무 작고
눈보라를 감당하기엔 아직 허술하다는 것을
이 고요한 아버지의 비밀을 엿보려고
바람은 국망봉까지 찾아와
푸른 잔디의 등을 부지런히 쓰다듬는다
가난하지만 넉넉한 마음으로 잎을 피운,
단단한 열매로 세상을 장식한 저 나무들
아버지라는 이름만으로도 거룩한 희생임을
나는 안다, 바람 많은 날 뒤돌아보면
여전히 아버지는 한 그루 나무라는 것을
[우수상] 달을 키우며 / 이인주
댑싸리꽃 울타리 너머 휘영청
보름달이 걸리던 밤
방문을 열고 아버지가 내 안으로 걸어 들어오셨다
맥고모자 깊게 눌러 쓴
앞이 안보이는 아버지는 불쑥
내 안에서 보름달을 꺼내 가셨다
안돼요 아버지, 그건 하나 뿐인 제 목숨이란 말예요
입안에서 또아리를 틀던 말들은 끝내 맥없이 주저앉았다
한 십년은 족히 걸릴껴
산사열매 술내음 풍기며 아버지는
그대로 문지방을 넘어 가셨다
누가 마른 하늘에 벼락을 치는지
옆구리가 마구 결리고 이날 이즉까지 달랑 달 하나
궁글려 시간을 키운 죄밖에 없는 년
방석을 깔고 오금저린 비망록을 쓴다
돌려주세요 아버지 동강난 달이라도 좋으니
흠집난 자리에 곱게 풀칠을 하고
한 십년 너끈히 품어 키울 터이니
들썩이는 장강의 물살 속 떠내려가는 환한 달
나는 멍청히 문설주에 기대어
달쪽으로 기울어지는 몸을 가누며
환장할 듯 눈물이 나는 것이었다.
[우수상] 강씨 아저씨 / 정순옥
-고향방문·3
어이, 이제 오는가
근디, 누구다요?
홀로, 동네 어귀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너무 가벼워진 몸 허공에 기대고
휘익 지나버리는 사람과 차 뒤꽁무니에
꾹꾹 세월 도장이나 찍고 있다
무서리가 몇 번 내린 뒤였던가
추수 끝난 번든 논배미 짚비늘
사람들, 몽글몽글 뭉개진 볏단 사이 들여다보며
위아래 동네 골목골목을 뜨겁게 달구었던 일
윗동네 자전거 여자와 몇 번 달빛을 몰래 본 것
그것뿐이었다고,
하얀 손사래 내어젔던 그 초겨울 이후
제방공사 사방공사장 돌밭그늘에 묻혀서
그 성긴 돌 틈으로 바람 밀어 냇물 강물
흘려보내느라 명절에만 나타나던
내 친구 아버지, 강씨
햇빛 쨍쨍한 토요일 오후
동네 앞 논배미 마다 새 뿌리내린 볏잎들
파랗게파랗게 나풀거리는데
골목 어귀에서 비뚜루 돌담밑 해그늘 지고
해 묵은 짚비늘로
그냥 앉아 계시네 그렇게, 아저씨
[우수상] 티푸나 / 김정원
담양 수북에서 읍을 거쳐
순창에 이르는 24번 국도변에는
메타세콰이어가 나무굴을 이루고 있다
겨울이 되어야 침엽수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이 활엽수들은 이국정취를 풍기며
지나는 사람들에게 큰 행복을 거저 준다
그런데, 30년의 행복을 삽시간에 앗아가는,
울화통이 터져 절로 욕 나오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
고속도로 통과, 벌목을 반대하는
사람들과 서명도, 사이버 공격도,
시위도 했지만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밤낮 기계톱 소리 요란하더니
황토피 흐르는 길만이 벌렁 발가벗고 쓰러져 있고
자동차 안의 찌푸린 얼굴들이
속력을 낸다
돌이켜보면
오늘 우리가 우리 된 것은
알게 모르게 우리를 길러주고 지켜준
나무 논 쌀 가축 물 공기 흙 하늘 박테리아…… 조상 같은
생명체들 아닌가
아름드리 나무를 인정사정없이 베고
큰길을 내는 것은
생명을 업신여기는 천박한 문명인의 일,
조상을, 마침내 나를 죽이는 일
아닌가
옛날, 아버지는 감나무에 까치밥으로
감 한두개씩 남겨두시는 것을 결코 잊지 않으셨고
할머니는 대를 이어 지붕 위에 새들의 모이를 던져주셨지,
한 노승은 꼭두새벽 지팡이로 풀섶을 헤치며 가셨고
이 길을 따라 티푸나*의 깊이를 찾아서.
* 티푸나(Tipuna)는 뉴질랜드 마오리족의 말로 조상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 말은 단순히 우리가 일컫는 할머니 할아버지와 같은 사람의 조상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나무, 땅, 하늘, 물, 공기, 곡식, 짐승 등등, 즉 지금 나를 있게 해준 모든 생명체를 의미한다.
부천시에서 제정 시행하고 있는 제4회 수주문학상 심사 결과 수원 임하혁(당 54세)씨의 「나무 아래서」가 대상 수상작으로 결정되었다.
우수상에는 대구 이인주(당 37세)씨가 「달을 키우며」로 1석을, 부천 정순옥(당 40세)씨가 「강씨 아저씨」로 2석을, 광주 김정원(당 40세)씨가 「티푸나」로 3석을 각각 차지했다.
지난 4월 공모 요강을 공고한 후 지난 8월 1일부터 20일까지 접수한 결과 총 346명이 2,579편이나 응모했으며 2차에 걸친 예심과 2차의 본심 등 모두 4심을 거쳐 지난 26일 수상자를 확정했다.
응모자수나 작품의 질적 수준에서 유수의 전국단위 문학상으로 자리매김하면서 수주 변영로의 문학정신을 계승 발전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고 있음이 이번 공모를 통해 재확인되었다.
대상에는 500만 원, 우수상 3명에게는 각 100만 원의 상금과 상패가 수여되며 시상식은 9월 28일 오후 3시 부천시청 대회의실에서 가질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