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글에서 온 풍경 / 유병만
베트남 며느리가 순산했다는 읍내 전화에
논두렁이 파랗게 깨어나고 있다
노인의 호흡이 불규칙해지고 완만하게 달라붙어 있던 들판이 뚝 떼어진다
잠시 주춤하던 족보의 한 갈래가 생기를 되찾고
상속되어져야 할 땅의 분량이 새로운 식량을 서두른다
그 압력을 견디지 못한 혼잣말이 논두렁을 가로지르던 바람에 베어 물리고
들녘 한 켠이 툭 닫힌 핸드폰 밖에서 곰곰이 쭈그려 앉는다
지난 시절은 불임의 푸르름이었다
지난날들은 불안한 가계였다
일찍 여문 씨알 몇 훑으려다가 부주의한 손가락이 주춤 열리고
갈길 바쁜 소나기가 허릴 낮게 구부려 담배내음 짙은 안쪽까지 적신다
문득, 월남전에서 아뿔싸
그 옛날 그 땅에 고엽제를 뿌렸던 기억을 하자
노인의 숨결이 노랗게 말라버린다
의족을 짚지 않으면 일어서지 못하는 기억들을 챙기려는 듯
낮게 기어 다니던 소나기가 더운 열기의 정수리 위로 떠밀리고
웅크려 있던 호흡을 힘껏 곧추세운다
며느리가 온 후
집안의 날씨가 더 따뜻해진 것도 태양을 혼수품으로 가져온 때문임을,
논두렁에 묻어 두었던 걱정을 가로질러 읍내로 빠르게 달려간다
[당선소감] "택했기에 설레고 아파할길… 뚜벅뚜벅 내일 걸어가겠다"
내 안에 희미하게 웅크리고 있는 공복이 당신인가요?
충혈된 낙타의 눈빛같은 홍차를 오늘도 그들과 함께 마셨습니다. 테러와 전쟁의 뉴스를 접할 때마다 차도르며 터빈 두른 글썽임으로 찾아와 그들의 나라가 내게 준 집, 티그리스 강물 소리로 거실을 서성거립니다. 양 볼에 눈물을 파종한 맨발의 아이들이 커서를 켜면, 나 또한 어린 촉수를 가진 유령이 되어 한밤중을 수런거립니다.
태양의 연인 같던 나라, 별 내리는 구릉과 신기루를 범한 푸른 날의 나의 죄, 유정(油井)에서 길어 올린 사하라의 울음은 꿈의 모래폭풍이 되어 새벽까지 입안에 으적거리곤 합니다.
지구촌에서 온 노동의 얼굴들마다에서 읽는 나, 우리들, 누가 누구에게 과연 이방인일까요. 섬같은 이 땅의 인연이 되어 며느리가 되어 탯줄 잘라 내일을 순산하는 지구촌의 여인들이 사랑스럽습니다. 희한하고 달콤하다고 낯선 겨울 풍경을 두 손에 가득 받아 웃는 모습에서 함박눈은 내 기억의 사막과 정글 위에 모든 종교가 되어 내립니다.
처음 얼음장들의 밤을 사유의 울림으로 함께 걸어 주신 진춘석 선생님, 다른 나무, 다른 열매가 되라는 주문으로 일갈하시던 박경원 시인의 참 정신이 쟁쟁 가슴에 들립니다.
도반들의 한글사전 앞에 새로운 격려를 꺼내어 랭보처럼 좋아하시던, 울컥울컥 살가운 중앙대 문창과 이승하 교수님, 한 해 동안 우주를 받아 안느라 향유고래 가시를 감히 목젖에 따끔거리게 했던 장석주 선생님, 경인일보사와 주위의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택했기에 설레고 아파해야 할 길임을 잘 압니다.
길 없는 길을 열어 낙타처럼 가야겠지요. 발굽보다 가슴이 뜨거워야 하고 알람시계의 새벽을 불면으로 더 많이 살해해야겠지요. 오아시스에 비친 태양의 동공을 만나면 또 글썽거리면서요. 에둘러 돌아와 마주한 당선 소식, 참새들마저 포릉, 포르릉, 자선(慈善)의 썰매를 끌고 날아다니는 계절이어서 이런 받음이 부끄럽습니다. 늦게나마 거실의 공간을 허락해준 곽일영(郭一寧)여사와 미나, 민영의 응원 늘 힘이었다고 뚜벅뚜벅 가야할 내일을 겸허히 추슬러보는 다시 혼자만의 새벽입니다. 편운제의 문우들과 시샘동아리의 맑은 눈빛들, 사계절 환한 '안성 詩 문학회' 사람들이 아른거립니다. 늦깎이에게 마다않고 휘둘러 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의 소중하고 고마운 회초리, 기꺼워 옷깃을 여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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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죽음통해 생명 영속력 표현… 리얼리티+상상력 조화로워"
대체로 평년 수준을 유지하고 있는 이번의 응모작들은 소재주의가 눈에 띄었다. 시대적 소외의식의 반작용이라고 보여지는 가족애를 소재로 한 작품이 많았다. 이런 시편들은 자연스럽게 회고지향의 색깔을 띄게 될 수밖에 없다. 또한 지나치게 신춘문예를 의식하고 씌어진 작품들이 많았다. 이 경우 시편들은 결핍된 의식을 드러내거나 현란한 수사와 함께 허위의식으로 시문이 채워지는 경향을 보이고 있었다. 대부분의 응모작이 응모자의 기본정조에 따라 지향성을 이루면서 독특한 색깔을 드러내고 있어 상당한 수준의 어법을 터득하고 있다고 판단되지만 지나치게 안정되어 있어 파격적인 실험정신을 볼 수 없었던 점은 아쉬움으로 남았다.
심사위원 두 사람은 '잘 못 배달된 편지처럼', '정글에서 온 풍경', '김밥에도 천국은 있다', '그녀가 내 마음의 틈에'를 최종심에 올리고 토론을 거쳐 김순자의 '잘 못 배달된 편지처럼'과 유병만의 '정글에서 온 풍경'으로 수상작을 압축했다.
'잘 못 배달된 편지처럼'은 현관문 오른쪽에 나란히 붙어 있는 네 개의 명패를 우표로 상상하는 것으로부터 시가 시작된다. 그러므로 화자의 집은 편지봉투이고 집으로 귀가하는 화자는 한통의 편지인 것이다. 편지의 끝에는 의례히 타인의 말인 추신이 따르고 "어디로든 반환되어야 할 떠돌이 우편물이"라고 스스로를 말한다. 삶의 정처 없음과 부박함을 드러내는 '가볍디 가벼운 지구의 검불'이라는 인식은 새롭지는 않으나 성찰의 소산이다.
'정글에서 온 풍경'은 베트남 며느리가 순산했다는 전화에 "논두렁이 파랗게 깨어나고 있다"는 신선한 충격으로부터 시가 시작된다. 서사가 있는 이 시편의 주인공은 월남전에 참전했던 퇴역의 군인이며 농사를 짓는 노인이다. 노인에게 "지난 시절은 불임의 푸르름이었"으며 "지난 날은 불안한 가계였"다. 이제 며느리의 순산으로 "잠시 주춤했던 족보의 한 갈래가 생기를 되찾"았을 뿐 아니라 "집안의 날씨가 더 따뜻해진 것도" 며느리가 태양을 혼수감으로 가져온 때문이라고 안도하는 것이다.
김순자가 경쾌한 상상력의 시세계를 보인다면 유병만은 삶의 곡진한 무게를 드러낸다. '정글에서 온 풍경'은 월남참전의 역사적 부채의식과 다문화가정으로 대변되는 인류애를 드러내면서 손자로 상징되는 생명과 노인으로 상징되는 죽음의 의미를 통해서 영속하는 생명력을 보여준다. 시는 기본적으로 리얼리티이다. 그러나 리얼리티만으로 시가 되지는 않는다. 상상력이라는 창조적 에너지가 필요한 것이다. 유병만의 작품은 이와 같은 시의 준거를 모두 확보하고 있다고 생각되어 심사위원 두 사람은 쉽게 '정글에서 온 풍경'을 당선작으로 뽑는데 합의했다. 아깝게 기회를 놓친 김순자의 시도 머지않아 우화등선의 기쁨을 누릴 것으로 믿으며 당선자 유병만의 시세계가 더욱 깊어지고 풍요로워지기를 기대한다.
- 심사위원 : 김윤배·홍신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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