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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 질경이의 꿈 / 임경묵

 

 

질경이도 꽃을 피우냐고요

바람이 구름을 딛고 하루에도 수천 번씩

오르락내리락하는 소백산 정상에서

꽃 안 피우고 살아남는 게 어디 있나요

노루오줌도 찰랑찰랑 지린 꽃을 피우고

심지어 개불알꽃까지 질세라 덜렁덜렁

망태를 흔드는데요 사실 말이지

그렇게 아웅대며 서둘 필요는 없거든요

밟힐 때마다 새파랗게 살아남아

가끔 뿌리까지 헹궈주는 바람을 끼고

소백산 허리에 닥지닥지 달라붙은

저를 보신 적이 있잖아요

실직한 당신의 낡은 등산화 밑에서도

이렇게 구겨진 날을 밀어 올리잖아요

혹시

뒤돌아보지 않고 지나온 길이 후회되세요

흔적도 없이 지워드릴 수도 있거든요

가파른 오르막길이 팍팍하고 힘들면

부담없이 제 발목쟁이를 또옥 따서

풀싸움이나 하면서 잠시 쉬었다 가세요

길 잃어 막막한 당신이 뿌리 채 뽑아서

하늘 높이 제기차기를 해도 그만이구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제가 가진 그늘은

씨방처럼 부푼 땀방울들을 말리기엔

너무 키가 작으니까요

그러니까 제 발목쟁이를 드린다는 거예요

대신에 당신의 캄캄한 어깨를 껴안고

하산하던 씨앗 한 톨이

고개 묻고 돌아가는 당신의 뒤안길 혹은

보도블록 틈에 질긴 뿌리를 부리고 서서

언젠가 당신의 지친 발목쟁이에

입 맞출 수 있다면

저는 밟혀도 정말이지 괜찮거든요

 

이젠 당신도 다시 한 번

울먹이는 희망을 돌볼 시간이잖아요

 

 

 

 

체 게바라 치킨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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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상] 동굴 탐사 / 박기동

 

 

어떤 상처는

살 속 깊이 흉터를 만든다

또 어떤 흉터는 돌에 박힌 그림처럼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는다

어두운 화랑의 통로를 지나

암벽을 더듬는 내시경 벽화 앞에 멈춘다

화가가 동굴을 지나간 뒤

알타미라는 천만년을 보내고도 살아있었다

붓은 칼보다 깊다더니

통증은 도려내도 되살아났던 것이다

자라난 들소의 뿔이 칼자국을 불렀듯

쥐뿔같은 사랑도 상처로 남은

내 속을 지나간 사람 하나 깊은 발자국을 남겼다

시도 때도 없이 재발하는 불치의 그림 하나 얻었다

돌아와 다시

쓰린 공복을 지나 긴 잠복을 지나

모니터에 재연되는 한 폭의 후유증으로 돌아와

천만년 전의 상처를 들추는 오후 네시 경

 

 

 

 

 

[우수상] 함석장이 노인 / 정철웅

 

 

벌교장터 서너 평 좁은 가게

함석장이 노인 하루 온종일 함석을 두드려

만 오천 원짜리 조리 하나 만든다

그는 평생 입보다는 손으로

세상을 향해 말을 걸어온 것이다

오십 년째 함석 두드리는 소리에

가게는 온종일 귀가 먹먹하다

하루 종일 입을 굳게 다물어야

함석조리가 함부로 새지 않는 것인지

그에게선 말 한 방울 허투루 새지 않는다

그래서 그의 손에 온몸을 얻어맞고

세상으로 나간 단단한 조리들은

제 아래 엎드린 파꽃들이나 상추들에게

몇 년째 끄떡없이 말씀을 뿌리고 있다

벌교 장바닥에 함석장이 노인

열아홉 나이에 배운 함석일

가르칠 열아홉은 어디에도 없고

온종일 입을 굳게 다문 채 함석을 두드린다

요즘에도 팔리는 만오천 원짜리 함석조리를

하루에 한 개씩은 거뜬히 만들고 있다.

 

* 조리: 물뿌리개

 

 

 

 

 

[우수상] 흐린 명조체의 시 / 현택훈

 

 

시립 도서관 벤치 옆에 있는 비파나무엔

올해도 비파가 노랗게 익었을까

당신은 대답이 없다 나도 예전엔

나를 읽고 있는 당신처럼

책 한 권의 오후를 사랑했다

이 창은 기억할까 책을 읽다가

덮어두고서 바라보던 창밖엔

태양이 빛나고 있었고 물에 번진

글자처럼 흐릿한 바람이

창틈으로 불어오곤 했지

구름들이 날아다니다가 대열을 놓친

철새처럼 몇 어절씩 빠져나갔고

그날 나는, 가을과 저녁의 페이지에

모음 하나가 되어 한 형태소에 들어갔다

삶이란 서로 가슴에 활자를

새기는 일이었다 그리고 나는,

창 밖을 바라보면서 조그맣게

허밍을 내는 것을 좋아하던

한 사람을 기억한다 그의

목소리는 비닐표지처럼 반짝였다

그는 노래를 흥얼거렸고 나는

시를 썼다 바람이 조금 열린

창틈 사이로 불어온다 이제

당신은 창 밖이 궁금해질 것이다

어순에 맞게 차례대로 흘러가고 있을

계절들 굳이 비파나무 아래서

시를 쓰지 않아도 형광등은

가르랑거리고 단음계의 노래를

몇 소절 부르지 않아도

한 페이지가 넘겨지더라

시옷 자음처럼 쓸쓸한,

턱을 괸 당신의 옆얼굴

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난 아무 곳에도 가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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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요로운 수확의 계절 10월을 맞이하여 우리 문단의 큰 별이자 부천의 큰 자랑인 민족시인 변영로 선생을 기념하기 위한 '2회 수주 변영로 문학제' 및 제8회 수주문학상 시상식이 부천시청 대회의실에서 열렸다.

 

이번 수주문학상 대상은 임경묵(교사, 시흥시, 70년생)씨 작품 '질경이의 꿈'이 수상했으며 우수상은 현택훈(강사, 대전시, 74년생), 박기동(사업, 부천시, 59년생), 정철웅(교수, 광주시, 59년생)씨가 각각 수상했다.

 

이번 수상은 지난 8월 중에 시 부문에 대해 전국 문인을 대상으로 공모를 실시하여 353명이 2,732편을 응모되어 이 중에서 4명의 수상작이 결정되었으며 대상은 5백만 원, 우수상은 1백만 원의 상금을 각각 지급받았다.

 

올해로 8회째를 맞이한 수주문학상은 부천이 고향이며 작고 후 고향 땅에 묻혀 계신 수주 변영로 선생의 뛰어난 문학 기량과 올곧은 민족정신을 기리기 위해 부천시에서 1998년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이듬해인 1999년 제정되었다.

 

질경이의 꿈, 동굴 탐사,함석장이 노인, 흐린 명조체의 시등 네 편의 응모작이 마지막 심사 대상이 되었다. 본심을 통과한 응모작의 상당수가 일정 수준에 올라 있었지만, 특히 네 분의 시는 시적 수련과 작품으로서의 성취도가 높았다.

 

심사위원들은 고심 끝에 질경이의 꿈을 대상작으로 결정하였는데, ‘실직한 당신을 질경이풀의 질긴 생명력에 비유한 이 작품은 최근 문단에 발표되고 있는 서정시의 약점을 발전적으로 극복한 좋은 시라고 판단되었다.

 

시적 서술의 묘사력과 언어의 유연한 구사능력 그리고 대상에 대한 관찰 등이 적절한 어조에 실려 있어 뛰어난 시적 호소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흐린 명조체의 시는 서정적이며 안정된 어조로 유려하게 끌어나가는 솜씨가 돋보였으며, 동굴 탐사는 관념적이기는 하지만 단단한 시적 구성을 보여주었으며, 함석장이 노인또한 건조하지만 사실적인 관찰력이 두드러져 보였다.

 

대상 수상자와 우수상 수상자들에게 뜨거운 축하의 박수를 보내드리며, 아깝게 탈락한 다른 응모자들에게는 아쉬움과 격려의 말을 전해 드린다.

 

- 심사위원 이승훈, 최동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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