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꽃이 지다 / 오영애
흰꽃이 진다 한꺼번에 진다 비를 맞으며 서서 수십 톤씩 진다 무더기무더기 진다 바야흐로 진다 가슴이 하나 진다 통곡하듯 진다 둥둥 떠서 진다 꽃상여로 진다 절뚝절뚝 진다 맨땅위에 진다 색 없이 진다 화 없이 진다 자식 없이 진다 원수 없이 진다 수의(壽衣) 없이 진다 실로 꽃 곁에 가까이 울며 서 있는 장바구니 든 나도 진다
[당선소감] 시는 삶의 구원이자 치유였다
뛸 듯이 기쁩니다. 무변창공을 훨훨 날아오를 것만도 같이 기쁩니다. 무거운 마음의 짐을 이제야 벗어버리는 듯한 홀가분한 이 기분 생에 최곱니다. 스스로에게 보상을 줍니다. 무량으로 기쁩니다.
뼛속까지 다 비워버리고 가벼워질 대로 가벼워진 시조새의 날갯짓이 이런 것인가 봅니다. 몸속으로 파고듭니다. 좀체 떠날 수 없었던 슬픔 덩어리들이 한꺼번에 깨지고 부서지고 여과 없이 떠나갑니다. 화석으로 옹이 박혀 점점 더 깊이 화인 자국을 남기고 결집해 있던 시의 응어리들이 가차 없이 떠나가고 있습니다. 십수 년 떨어지기를 반복하며 곪을 대로 곪은 상처투성이, 그야말로 구제불능인 신춘폐인으로 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수렁에서 한 발짝도 움직일 수조차 없는 몸과 마음으로 지쳐 가고 있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스스로에게 용기와 위안을 주며 다시 일어날 수 있게 힘을 주었던 것은 문학에 대한 열정, 즉 위대한 시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도 같습니다. 제게 시는 삶의 구원이자 치유였으니까요.
이제 시의 꽃을 피우는 봄이 왔습니다. 마음껏 시의 밭을 누비며 황량했던 마음을 갈고닦으며 경작해 보이겠습니다. 당선 소식을 듣던 전날 밤 꿈속에서 본 영롱한 빛깔의 시 무지개를 하늘에 걸겠습니다. 한림대 김은자 교수님 감사합니다. 오태환 선생님 감사합니다. 제 식구들 감사합니다. k.k.k 문우님들 감사합니다. 끝으로 경남신문사와 심사위원 선생님들 너무도 감사합니다.
지상으로 내려오는 첫눈을 두 손으로 받습니다. 공손히 받습니다. 모두 고맙습니다.
[심사평] 오롯한 말솜씨와 창조적 가락
시처럼 짜맞춘 시, 시로 보이기 위해 안달하는 시, 쓰는 사람 스스로도 재미 없을 그런 시를 읽는 일은 피곤하다. 해묵은 사회적 낭비. 기성 양복을 입은 듯한 말씨만 번잡스럽다. 이즈음 평균 취향이 그렇다며 넘기고 말기에는 씁쓸할 따름. 신춘문예 당선을 겨냥한 신인이라면 자기 목소리를 갖고자 고심한 흔적 정도는 보여야 하는 게 아닌가. 마지막까지 남은 세 편을 두고 뽑는 이는 그 점을 먼저 살폈다.
김혜경의 ‘진화론’은 변기에 앉는 삶에서 거미의 생태를 유추한 시다. 자신도 “발 대신 다리”가 “돋아날 듯” 쓰리다는 마무리까지 무리가 없다. 그러나 다른 거미 글감 시들과 나뉠 만한 확연한 울림은 얻지 못했다. 김혜강의 ‘비’는 제목 그대로 비에 대한 풍정시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엮은 직조술이 참신했다. 그럼에도 비를 빌린 땅과 하늘의 교감을 “옥황상제와 몸 섞는 소리”라 한 데서 평범에 머물고 말았다.
오영애의 ‘흰꽃이 지다’는 앞선 둘에 견주어 신춘문예용 시에서 멀다. 단형에다 담긴 속살 또한 막연하다. 감상적이기까지 하다. 짜임도 ‘ㄱ이 진다’는 월의 엮음과 되풀이로 한결같다. 그것을 받치는 몸말은 명사형에 갇혀 감각적 표현성을 지니지 못했다. 그럼에도 무엇보다 창조적이다. 자기 가락을 지녔다. 자신이 겪은 바를 자기 목소리로 뱉는 힘이 시인 되는 첫 조건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증명한다.
게다가 말솜씨까지 오롯하다. 이 시는 삶의 막연한 속살로 길게 이어진 앞과 “장바구니 든 나”를 내세운 짧고 구체적인 마무리 월, 두 매듭으로 짜였다. 그런데 둘 사이 단층이 지닌 뜻은 크다. 앞 매듭에 넘치는 감상이 삶의 깊이로 뒤바뀌는 놀라운 비약을 뒤 매듭이 마련한다. 한 여자가 겪은 아픈 간난을 단형의 가락으로 울림 크게 살려 낸 절창 ‘흰꽃이 지다’. 오 오 시인, 멀고 멀 창작의 길에서 독야청청 피고 피기를.
- 심사위원 : 박태일·김언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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