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냥감을 찾아서 / 안차애
1
배꼽에서 비스듬히 3cm 위쪽 지점을 깊이 맞뚫어
피어싱(piercing)*한다
생각보다 많은 출혈량은 있었지만
멧돼지 어금니 모양의 둥근 봉 두 개를 마주 꽂아
기쁨을 장식한다
바야흐로 성인식이다
어제는 들소 뿔 모양 장신구를
그제는 사슴의 목뼈 모양 링을
며칠 전엔 상아 모양 고깔을
미간에 귓바퀴에 귓불과 입술에 바짝 매달았다
비로소 야생 동물의 더운 피가 쿵쾅거리며 온몸을 뛰어다니고
2
사냥감이야 늘 지천이다
혼다 4기통 오토바이로 시속 100km 남짓 달리다 보면
알타미라 동굴 근처의 바람을 사로잡을 수도 있다
지중해 노래방에서 고래고래 악을 쓰다 느닷없이
오츠크해산 고래 한 마리가 친구 입 속에서 튀어나오는 걸
깔깔대며 잡기도 한다
취향이야 늘 바뀌기도 하므로,
오늘밤엔 늙은 아버지의 가슴뼈 밑에 숨어 사는
느린 곰의 촌스러운 진지함을 새삼 사로잡아
혓바닥에 박고 싶다, 아주 기학적으로
* 눈 코 배 등 신체의 일부를 뚫어 멋을 내는 장식
[당선소감] '한숨·욕지기도 꽃들의 향연'
부산일보사의 당선 통보 전화가 왔을 때 나는 빈 교실에 있었다. 하루 전날 방학을 했으므로 교실은 물론 학교 전체가 물속 처럼 조용했다.
빈 교실의 적막함과 호젓함이 하도 좋아 본의 아니게 제일 늦게 퇴근하는 선생님, 일요일이나 방학 때 살짝 교실로 스며들곤 하는 선생님이 되었다. 생업의 터전인 교실이 꿈꾸거나 넋 놓고 쉴 수 있는 나만의 별천지로 잠시잠시 변신해주는 그 힘으로 매일을 탈 없이 살아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른도 훌쩍 넘어 찾아 온 시에 대한 짝사랑도 마찬가지다. 엄마이거나 아내 혹은 선생님이거나 이웃집 아줌마인 빤하고 팍팍한 일상을 문득 반짝임으로 속삭임으로 눈맞춤으로 환하게 변신시켜 주는 묘사와 은유의 꽃밭.
그 속에서는 내가 매일 먹고사는 한숨도 욕지기도 시장바닥 같은 소란스러움도 더 이상 시끄러운 신파가 아니다. 제 빛 제 발돋움 갸륵한 꽃들의 향연인 것이다.
생각해보면 감사한 이들이 너무 많다.
시의 씨앗을 가슴에 심어준 부산의 선배님,시의 떡잎 내는 법과 꽃피우는 법을 '보리 문둥아' 애칭으로 부르시며 일러주신 문학아카데미의 박제천 선생님,더 넓고 풍요로운 시의 꽃밭으로 나가게 해주신 황동규 김창근 두 분 심사위원님과 부산일보사에도 다함 없는 감사함을 전하고 싶다. 4년 전쯤에 서울의 변방인으로 편입해 아직도 서럽고 안타까운 것이 많은 나에게 고향이 준 너무 큰 격려이다.
[심사평] 강렬한 파괴력과 참신한 감각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오른 작품은 26편이었다. 모두가 일정 수준 이상인 것은 당연하다 하겠으나, 그만큼 어슷비슷한 완성도에만 급급한 작품이 많아 미흡한 바도 적지 않았다.
기법은 초현실주의를 내세우려는 것 같은데 무의식을 통한 인간 해방의 세계관이 없는 것, 유독 산문시 형태의 시편들이 많은데도 리듬을 살리기 위한 고통의 흔적마저 없는 것 등이 두드러지게 거슬렸다.
비록 높은 수준이 아니더라도 자기 목소리를 찾아 나서는 개성적 순례자가 많았으면 좋겠다는 것이 선자들의 공통적인 주문이었다.
마지막까지 남은 작품은 '복천동고분' '화석' '길 아래에 집이 있다' '사냥감을 찾아서' '방음벽' '등대이발관'의 여섯 편이었다. 용호상박으로 자웅을 겨룰 만하였으나, 다들 결승점에서 머뭇거렸다. 틀을 깨뜨리지 않고는 새로운 도전의 기회도 없는 법, 마침내 여러 가지를 참작하여 안차애의 '사냥감을 찾아서'를 당선작으로 결정하는 데 합의했다.
당선작 '사냥감을 찾아서'는 자칫 규격 일탈의 즐거움에만 그칠 위험이 없는 바는 아니나, 완성품 만들기의 안전 운행에 여념이 없는 대부분의 '괜찮은 작품'들에 역행하는 강렬한 파괴력과 참신한 감각을 높이 살 만했다. 앞으로 노력 여하에 따라서는 크게 떨쳐 일어나리라는 잠재력까지 감안하였음을 참작하여 좋은 작품 많이 써 주길 바란다.
심사위원 황동규·김창근
'신춘문예 > 부산일보'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06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 천종숙 (0) | 2011.02.11 |
---|---|
2005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가작 / 손병걸 (0) | 2011.02.11 |
2004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 김춘남 (0) | 2011.02.11 |
2003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 신정민 (0) | 2011.02.11 |
2001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 이선희 (0) | 2011.02.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