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발화점 / 정창준
바람은 언제나 삶의 가장 허름한 부위를 파고들었고
그래서 우리의 세입은 더 부끄러웠다. 종일 담배 냄새를
묻히고 돌아다니다 귀가한 아버지의 몸에서 기름 냄새가 났다.
여름 밤의 잠은 퉁퉁 불은 소면처럼 툭툭 끊어졌고 물 묻은
몸은 울음의 부피만 서서히 불리고 있었다.
올해도 김장을 해야 할까. 학교를 그만둘 생각이예요.
배추값이 오를 것 같은데. 대학이 다는 아니잖아요.
편의점 아르바이트라도 하면 생계는 문제 없을 거예요.
그나저나 갈 곳이 있을지 모르겠다.
제길, 두통약은 도대체 어디 있는 거야.
남루함이 죄였다. 아름답게 태어나지 못한 것,
아름답게 성형하지 못한 것이 죄였다. 이미 골목은 불안한
공기로 구석구석이 짓이겨져 있었다. 우리들의 창백한
목소리는 이미 결박당해 빠져나갈 수 없었다. 낮은 곳에
있던 자가 망루에 오를 때는 낮은 곳마저 빼앗겼을 때다.
우리의 집은 거미집보다 더 가늘고 위태로워요.
거미집도 때가 되면 바람에 헐리지 않니. 그래요.
거미 역시 동의한 적이 없지요. 차라리 무거워도
달팽이처럼 이고 다닐 수 있는 집이 있었으면, 아니
집이란 것이 아예 없었으면. 우리의 아파트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 고층 아파트는 떨어질 때나
유용한 거예요. 그나저나 누가 이처럼 쉽게
헐려버릴 집을 지은 걸까요.
알아요. 저 모든 것들은 우리를 소각(燒却)하고
밀어내기 위한 거라는 걸. 네 아버지는 아닐 거다.
네 아버지의 젖은 몸이 탈 수는 없을 테니. 네 아버지는
한 번도 타오른 적이 없다. 어머니, 아버지는
횃불처럼 기름에 스스로를 적시며 살아오셨던
거예요. 아, 휘발성(揮發性)의 아버지.
집을 지키기 위한 단 한 번 발화(發火)
[당선소감] “철거민 들여다보면서 詩 표현 떠올려”
“시를 다시 쓰면서 딱 3년만 신춘문예에 응모하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올해가 바로 3년째가 되는 해네요.”
정창준씨(36)는 울산 대현고 국어교사다. 대학 시절 동아리에서 시를 썼지만 졸업과 동시에 교사로 취직하면서 자연스럽게 시와 멀어졌다. 내년이면 교사 경력 10년째인 정씨가 그 꿈을 다시 꺼내들 게 된 것은 3년 전 “대학 시절 썼던 시들이 좋던데”라는 말을 대학원 교수로부터 전해 들으면서다. 대학시절 썼던 시들은 컴퓨터 메모리가 삭제되면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우연치 않게 남아있던 유일한 프린트본을 후배로부터 돌려받으면서 정씨는 다시 시를 쓰게 됐다. 그리고 3년째, 마침내 ‘오래된 꿈’이 이뤄졌다.
당선작 ‘아버지의 발화점’은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과 용산참사를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다. 정씨는 <난쏘공>의 화법을 인용했다고 직접적으로 밝혔다.
“용산참사는 결코 있어선 안 되는 너무 끔찍한 일인데도, 사람들에게 쉽게 회자되기만 할 뿐, 절실한 이야기들은 외려 나오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난쏘공>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소설이고 학생들에게도 꼭 가르치는 작품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가 1970년대와 하나도 다르지 않다는 것이 마음 아파서 그것을 모티프로 시를 쓰게 됐습니다.”
정씨는 자칫 상투적으로 흐를 수 있는 주제를 체화된 언어로 피부에 와닿게 표현했다는 호평을 심사위원들에게 받았다. 정씨는 “울산은 급격한 팽창 과정을 거치면서 용산만큼이나 많은 문제를 가진 도시”라며 “재개발이 예정된 학교 옆 철거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자주 관찰하면서 자연스럽게 시의 표현들이 나오게 된 것 같다”고 말했다.
당선작 이외의 다른 시에서도 사회문제나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정씨의 관심과 애정을 엿볼 수 있다. 정씨는 삼성반도체 공장에서 백혈병으로 사망한 노동자, 대형마트, 베스트셀러나 실용서로 채워지는 서점의 풍경을 시로 써내려갔다. 그는 “사람에서 비롯되고 사람다움을 지키는 게 문학의 가장 큰 소임인 것 같다”며 “사회적 약자들이나 사라져가는 것들에 시선이 갈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정씨는 “신춘문예는 하나의 과정일 뿐”이라며 “아직 시 세계나 세계관이 명확하게 정립되지는 않았지만 현실에 꾸준히 관심을 갖고 충실하게 재현해내고 싶다”고 새내기 시인의 포부를 밝혔다.
[심사평] “실종된 현실 인식의 발견… 뭉클하다”
스무 분이 겨룬 이번 본심에서는 현실사회에 대한 관심이 반영된 시편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특히 보수 정부가 들어선 뒤 일상화한 사회경제적 위기의식이 예비시인들의 마음 밑바닥에 고이면서, 불안을 나누고 싶은, 나아가 희망을 찾고 싶은 연대의식, 소통 욕구가 발현된 것일 수도 있겠다.
최종심에 정창준(‘아버지의 발화점’ 외 4편), 김유미(‘삼거리식당 지나 명랑슈퍼’ 외 4편), 김영진(‘도끼발’ 외 4편), 류성훈(‘밤의 도플러’ 외 4편), 한주연(‘슬리퍼를 밟는 순간’ 외 4편) 이 다섯 분의 시가 올랐다.
김유미의 시편들은 글 다루는 솜씨, 이야기를 꾸미는 솜씨가 돋보인다. 유머러스하기도 하다. 그런데 특별히 새롭지가 않고 고만고만하다. ‘고백’은 김유미의 장점이 생기있게 모인 시다. 다른 시들과 ‘고백’은 백지 한 장 차이지만, 그 백지는 얼마나 두꺼운가? 한주연의 ‘슬리퍼를 밟는 순간’은 슬픈 얘기를 담담하게 그려 독자로 하여금 고즈넉이 귀기울이게 한다. 잔잔한 매력이 있는 자기만의 화법이다. 류성훈은 시적인 순간을 발견하는 능력이 빼어나다. 그런데 그 시적인 순간을 자기화하지 못한다. 늘 최종심에 오르지만 결국엔 내려놓게 되는 시들이 있다. 언뜻 아주 시적이나 공허하고 생명감이 없는 시들. 경험이 내재화돼 있지 않은, 육체가 없는 시들.
김영진의 시들은 ‘새만금’이나 대학생들의 취직 문제, 세습되는 가난 등 오늘의 현실을 그리고 있다. 소재도 주제의식도 상상력도, 다 좋다. 그런데 목적의식이랄지 의욕이 지나친 나머지 작위적이고 과장된 표현이 끼어 있어 시가 덜그럭거린다.
정창준을 당선자로 내세우게 돼 뿌듯하다. 응모한 다섯 편의 시 가운데 어느 작품 하나 모자람이 없지만, 제일 앞장에 놓은 ‘아버지의 발화점’을 당선시로 올린다. 정창준의 시들은 우선 신선하다. 우리 시단에서 꽤 오래 실종됐던 현실인식이나 생활감각을 가진 시를 보게 된 것도 반갑지만, 그 사회적 상상력을 드러내는 발성이 새롭고 독창적이어서 더 반갑다. 정창준의 시들은 감동적이다. 뭉클하다. 심금을 울린다.
심사위원 이시영 시인(왼쪽)과 황인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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