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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발 680의 굴뚝새 / 심은섭

 

 

면사무소에서 4더 지나 우편번호 233-872에 살던

굴뚝새는 사내 굴뚝새를 산 14번지에 묻어 두고

경적소리와 높은 빌딩들이 난무하는 우편번호 100-866

69층 아랫목에서 무-말랭이가 되어 간다

우체국에서 지어준 100-866의 우편번호를

문패에 문신처럼 새겨놓고 살지만

14번지 바람소리 전해줄

우편배달부의 발길이 끊어져버린 지가 오래다

몇 날을 견딜 수 있는 수분이 얼마 남지도 않은

해발 680에 살던 굴뚝새를

굴뚝새의 굴뚝새들이 바라보며 쌀독에

파랑주의보가 내려 호미자루를 놓지 못하던 날들과

냉수에 간장을 섞어 헛배 채우며 새우잠 자던 날도

미납된 등록금 영수증 머리맡에 두고

밤새워 신열을 내던 일들을 떠올린다.

절구공이에 짓이겨진 그녀의 가슴에는

슬픈 보석 몇 개 박혀 있다

두어 개의 천둥소리

하얀 달 몇 개와 서너 개의 태풍 그리고

몇 밤에 내린 무서리에 말라진 몸, 더 말려야

천국의 층계 만이라도 가볍게 오르려는 듯

남아 있는 그들의 짐이 가벼워진다는 것도 안다

점점 더 멀어진 눈과 눈 사이의 간격

문 밖까지 나온 기침소리가 폐경을 맞는다

우편번호 없는 묘비를 들고 오후 내내

창 밖에서 서성이던 검은 도포를 입은 바람이

조등(弔燈)을 든 굴뚝새들의 포효를 뿌리치며

반송되지 않을 정량(定量)의 화석을

목관 속에 편히 눕힌다

 

 

 

 

 

K 과장이 노량진으로 간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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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목 매 달아 죽어도 좋을 나무 - 

 

종은 울지 않으면 종이다 종은 울지 않으면 종이 아니다 종은 울면 종이다 종은 울면 종이 아니다 부재중인 수신함에 흔적을 남기고 사라진 전화 한 통으로 문학의 종이 되려고 한다. 나에게 문학 속의 시()는 목 매 달아 죽어도 좋을 나무가 되었다 신춘문예 당선의 소식을 듣고 바이러스에 감염된 고인돌처럼 오래도록 서서 침묵했다 종이 될 수 있는 여러 갈래의 길을 생각했다 산에 사는 산죽(山竹)이 떠올랐다 속을 더 비워야 담을 수 있는 공간이 생길 거라고, 사시사철 푸름을 잃지 말자고, 작은 키라도 더 낮추자는 깨달음이 없어 한 번도 산에서 마을로 내려오지 못해 대쪽이라고, 이것이 문학의 종이 되려는 해답의 근본이며 해답의 결과이며 해답의 이유일 거라는 생각을 했다 놓으려던 붓을 잡아야겠다 소외받는 달동네 사람들의 반장이 되어 언어를 잃어버리고 사는 그들의 의미를 써야겠다 영육간에서 방황하는 어휘들을 불러 모으고 다듬어야겠다

 

지금까지 시의 의미를 부여해주신 이언빈 선생님, 시를 경작하는데 필요한 도구 사용 방법을 알려주신 '시와 세계' 발행인 겸 주간이시며 대관령 시인학교를 운영하시는 송준영 선생님, 곁에서 만날 때마다 격려해주신 김학주 시인께 이 지면을 빌려 감사드리며 나와 시와의 싸움에서 늘 중립적 입장을 지켜오며 감나무 까치밥처럼 외톨의 나날이었던 권기순 아내에게도 감사드린다.

 

끝으로 문학의 성찬을 마련하고 초대하여 주신 경인일보와 단단하지 못한 작품에 당선이라는 영광을 안겨주신 두 분의 심사위원께 독한 다짐을 바치며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

 

 

 

 

Y셔츠 두 번째 단추를 끼울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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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예심을 통과한 서른 명의 시를 다시 선고하여 심사한 결과 본심위원은 심은섭씨의 '해발 680m의 굴뚝새'를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심은섭씨의 작품은 죽음을 안으로 조용히 끌어들이면서 서정적 상관물에 대한 객관적 거리를 유지하여 생사의 슬픔을 대칭적으로 이미지화하는 데 성공했다.

 

마지막까지 최종 경합한 장인수씨의 '쪽방 인현동 일 번지' 한창석씨의 '로드 킬' 김명옥씨의 '날마다 황선에 선다'도 수준작이다.

 

하지만 죽음을 과장되게 표현하고 상투적으로 터치함으로써 시적 진실이 훼손된 부분이 지적되었다. 문명 비판적으로 죽음을 선취하고 삶을 직시하려는 의표가 과한 나머지 시적 성취도는 오히려 떨어졌다. 우리 삶 깊숙이 스며든 죽음의 냄새도 사회적 미학적 거리를 유지할 때만이 시의 의상을 걸칠 수 있다.

 

당선작은 상당한 수준을 보여준 심미적 작품이다. 죽음의 종결을 파괴하지 않고 보존하고 기억하는 와 화자의 복화술은 이 처녀시를 돋보이게 했다. 시 형상이 서정적 자아에게 바라는 요구는 불립문자를 넘어서야 하는 것이 있는 바, 생이 불가피하게 성찰해야 하는 떠도는 자의 비애를 이 시는 건드리고 있다.

 

특히 산 번지와 도시의 우편번호, 살아있는 자와 죽은 굴뚝새로 매개되는 서사 구조의 소통은 아름답다. 당선자는 이 작품에 구속되지 말고 더 깊은 시세계를 펼쳐 시의 자유를 누리기 바란다.

 

- 심사위원 : 신경림, 고항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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