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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인트 공 / 성영희

 

그에게 깨끗한 옷이란 없다

한 가닥 밧줄을 뽑으며 사는 사내

거미처럼 외벽에 붙어

어느 날은 창과 벽을 묻혀오고

또 어떤 날은 흘러내리는 지붕을 묻혀 돌아온다

사다리를 오르거나 밧줄을 타거나

한결같이 허공에 뜬 얼룩진 옷

얼마나 더 흘러내려야 저 절벽 꼭대기에

깃발 하나 꽂을 수 있나

 

저것은 공중에 찍힌 데칼코마니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작업복이다

저렇게 화려한 옷이

일상복이 되지 못하는 것은

끊임없이 보호색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한 마리 거미가 정글을 탈출할 때

죽음에 쓸 밑줄까지 품고 나오듯

공중을 거쳐 안착한 거미들의 거푸집

 

하루 열두 번씩 변한다는 카멜레온도

마지막엔 제 색깔을 찾는다는데

하나의 직업과 함께 끝나는 일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가 내려온 벽면에는 푸른 싹이 자라고

너덜거리는 작업복에도

온갖 색의 싹들이 돋아나 있다

 

 

 

귀로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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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병상에서도 놓지 않은 시  뜻깊은 퇴원축하선물"

 

아프기 전에는 아프지 않은 것들을 보려했고 아프고 나서는 아픈 것들이 혈육 같아 보였다. 한동안 몸에 병을 들이고 나른한 잠에도 휘청거렸다. 그동안 낭비한 자정과 새벽의시간이 더없이 그리웠다. 이상하게도 시는 그립지 않았으나 주절주절 내가 나에게 털어놓는 잠언이 그리웠다.

 

기쁨은 기쁨끼리 몰려다니는지 당선이라는 기쁜 소식을 듣게 된 자리는 투병생활을 마치고 퇴원축하를 하는 자리였다. 병중에 있으면서도 시를 놓지 않았던 것을 지켜본 환우들이 분명 좋은 소식이 있을 거라며 퇴원축하와 함께 당선을 미리 축하해 주었었다. 수화기 속의 메시지는 며칠 전 꿈속에서 보았던 하얀 고봉밥그릇에 담긴 듯 만개한 벚꽃으로 만발하고 있었다. 권위의 장을 열어주신 대전일보와 부족한 글을 끝까지 놓지 않고 선해주신 나태주선생님, 이정록선생님께 더없는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누구보다 좋아하실 친정어머니 그리고 저의 빈자리를 묵묵히 지켜준 남편과 사랑하는 딸 다영이와 아들 연욱에게도 이 지면을 빌어 감사와 고마움을 전한다. 특히 전역 후 두 달 동안의 아르바이트로 이 시의 소재가 되어 준 아들에게는 각별한 애정을 더한다. 또한 오랜 시간동안 서로 다독이며 시의 길을 걸어온 문우들과 아픈 중에도 서로 위로와 힘이 되었던 환우들과 이 기쁨을 함께하고 싶다. 어느 순간 아픔이 밀려왔듯이 어느 순간 기쁨이 밀려와 새로운 길 위에 선 지금, 대전일보신춘문예의 전통과 시 정신을 이어받아 따듯하고 인본적인 시인이 되도록 노력하겠다는 다짐으로 벅찬 기쁨을 갈음한다.

 

 

 

[심사평] "좋은 시는 종이를 박차고 나와 독자를 환대한다"

 

신춘문예를 준비하는 글쟁이들의 펜 끝에서 새봄의 꽃망울이 터지기 시작할 게다.

 

2017년 대전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은 208명이 953편을 응모했다. 원고를 펼칠 때마다 꽃향기가 일고 꽃씨가 터졌다. 오래된 거름냄새가 풍겼다. 논두렁의 제비꽃부터 도심 복판의 팬지까지 다양한 봄 풍경을 만났다. 어느 꽃은 수증기가 꽉 찬 하우스에서 자신만의 시적 포즈로, 분간할 수 없는 시야를 펼쳐 보이기도 했다. 아쉬운 점도 있었다. 제 꽃잎의 빛깔만을 자랑하느라고 열매와 뿌리의 둥근 사색과 사투를 다 담아내지 못한 경우는 북을 돋워주고 싶었다. 꽃대나 이파리만으로도 땅 속 구근과 꽃씨의 과거와 꼬투리의 미래까지 볼 수 있는 여백이 큰 작품을 기다렸다. 전년보다 전반적으로 작품 수준이 향상이 되었고 신선한 작품이 눈에 많이 띄었다.

 

최종심에 든 작품은 성영희 님의 페인트 공  3, 박성수 님의 오렌지 홈런  4, 양순승 님의 어머니의 문장을 쓰다  2편이었다. 참신한 문장과 감정의 절제력과 현실을 읽어내는 시인의 진정성 등을 두루 갖춘 작품에 심사자의 마음이 모아졌다. 서울의 양순승 님은 진정성과 다정함이 장점이었지만 다년생 화초 같은 오래된 소재와 표현의 익숙함이 마음에 걸렸다. 광주의 박성수 님은 그 표현의 참신함이 감동으로까지 잇대어지지 못하고 부평초처럼 떠돌았다. 곧 뿌리모자가 묵직해져서 시적 기둥을 잘 받치리라는 기대를 주었다.

 

당선의 영광은 자연스레 인천의 성영희 시인에게로 모아졌다. 좋은 시는 스스로 종이를 박차고 나와 독자를 환대한다. 살아서 꿈틀거린다. 시의 명랑성이 잔치마당을 만들고 언어유희는 가락을 이루며, 그 노랫말이 현실이라는 구들장에서 온기를 끌어올리며 굴뚝연기처럼 하늘로 퍼진다.

 

신명 좋은 시인의 탄생을 축하한다.

심사자들의 눈이 어두워서 선외로 밀려난 분들에게도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 심사위원  나태주 이정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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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역귀 / 성영희

 

 

미역은 귀로 산다

바위를 파고 듣는 미역줄기들

견내량 세찬 물길에 소용돌이로 붙어살다가

12첩 반상에 진수(珍羞)로 올려 졌다고 했던가

깜깜한 청력으로도 파도처럼 일어서는 돌의 꽃

귀로 자생하는 유연한 물살은

해초들의 텃밭 아닐까

 

미역을 따고나면 바위는 한동안 난청을 앓는다

돌의 포자인가,

물의 갈기인가, 움켜쥔 귀를 놓으면

어지러운 소리들은 수면 위로 올라와

물결이 된다

파도가 지날 때마다

온몸으로 흘려 쓰는 해초들의 수중악보

흘려 쓴 음표라고 함부로 고쳐 부르지 마라

얇고 가느다란 음파로도 춤을 추는

물의 하체다

 

저 깊은 곳으로부터 헤엄쳐 온 물의 후음이

긴 파도를 펼치는 시간

잠에서 깬 귀들이 쫑긋쫑긋 햇살을 읽는다

 

물결을 말리면 저런 모양이 될까

햇살을 만나면 야멸치게 물의 뼈를 버리는

바짝 마른 파도 한

 

 

 

 

[당선소감] 마르기 전 마지막 숨결을 풀어 놓을 것

 

당선 통보를 받는 순간 일생을 통틀어 가장 즐거운 귀를 경험했습니다. 수화기 반대쪽 귀를 다른 한 손으로 감싸며 이 순간이 제발 꿈으로 빠져나가지 않길 간절히 바랐습니다. 깜깜하게 닫혀 있던 귀를 열고 그 안쪽에 싱싱한 해조류 한 포기 착생하는 듯 짭조름한 눈물이 고였습니다. 돌에서도 꽃이 필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 미역귀, 바짝 마른 미역귀를 물에 담그면 양푼 가득 푸른 바다는 수돗물에서도 탱탱하게 부풀곤 했습니다. 그건 마지막 숨결들을 풀어 놓는 일, 마르기 전의 물살을 기억해내는 일이었습니다.

 

제 몸을 원래대로 부풀리는 일, 잊지 않겠습니다. 시란 세찬 물길 속에서 소용돌이로 붙어사는 미역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흔들릴수록 어지럽고 어지러울수록 세찬 파도가 더욱 그리운 돌미역 같은 것. 귀를 잃고 난청을 앓는 돌과 바짝 마르면서 웅크린 미역귀처럼 다시 파도를 간절하게 기다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동안 몇 차례의 최종심에서 탈락하면서 깜깜하게 닫혀가던 내 귀에 천 번은 더 흔들려야 비로소 한 줄기 물살로 피어나는 미역귀처럼, 귀를 열고 다시 겸허해지라는 파도의 전언이었던 것 같습니다.

 

지난 주일은 뒤늦은 세례를 받은 날이었습니다. 길고 험한 파도를 지나 기도하는 삶을 선택한 저에게 찾아온 응답이 순은으로 아름답군요. 부족한 시를 끝까지 놓지 않고 격려해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과 경인일보에 깊은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또한 시 쓰는 딸을 누구보다 자랑스럽게 여기시며 마지막 손을 꼭 쥐어 주셨던 아버지와 홀로 남으신 어머니께 가장 먼저 이 영광을 드립니다. 시 쓴다고 아내로 엄마로 부족하기만 했던 저에게 묵묵히 응원의 힘을 실어준 남편과 딸 다영이와 아들 연욱에게 고맙고 감사한 마음 전하며 늘 든든한 방파제가 되어주신 문우님들과 이 기쁨을 함께 합니다.

 

 

 

귀로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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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인생론적 깊이 구체화한 은유

 

2017년도 경인일보 신춘문예에는 참으로 많은 분들이 응모해주셨다. 그 매체적 위상이 하루하루 높아져가는 경인일보에 수준 높은 작품들이 이렇게 많이 투고되고 있다는 것은 매우 소망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심사위원들은 본심에 부쳐진 작품들을 여러 차례 읽어가면서, 많은 작품이 만만찮은 안목과 역량을 보여주었다는 데 의견 일치를 보았다. 시단에서 주류를 형성한 시풍을 답습하거나 판박이에 가까운 관습적 언어를 보여주는 대신, 스스로의 경험적 구체성에 심의를 쏟은 것도 썩 긍정적으로 생각되었다. 이 모든 것이 한국 시의 좌표를 새롭게 개척해가려는 생성적 면모일 것이다. 심사위원들이 주목해서 읽은 분들을 가나다순으로 밝히면 강성애, 고은진주, 김기란, 김문숙, 나혜진, 성영희, 오세정, 이동우, 임상갑, 하예주 씨 등이었다. 오랜 토론과 숙의 끝에 심사위원들은 성영희 씨의 작품을 당선작으로 결정하게 되었다.

 

당선작으로 결정된 성영희 씨의 '미역귀', 바위에 달라붙은 미역줄기의 외관과 생태와 속성을 활용하여 인생론적 깊이를 드러낸 수작이다. ''로 살아가는 미역은 비록 깜깜한 청력을 가졌을지라도 언제나 파도처럼 일어서는 '돌의 꽃'이다. 그런데 미역을 따고나면 바위는 난청을 앓게 되고, 그렇게 바위와 미역이 구성하는 바다 풍경이 잠에서 깬 귀를 열어 다시 햇살을 읽어내는 풍경은, 그 자체로 '쫑긋쫑긋' 삶의 이치를 듣게 되는 우리의 모습을 고스란히 은유해준다. 다른 출품작들도 균질적인 성취를 보여 크게 믿음이 갔다. 더욱 성숙한 시편들로 경인일보의 위상을 높여주기 바란다.

 

당선작에 들지는 못했지만, 구체성과 심미성을 갖춘 언어를 통해 자신만의 미학적 성채를 구축한 사례를 많이 발견하였다는 점을 덧붙인다. 대상을 좀 더 일상 쪽으로 구체화하여 우리 주위에서 살아가고 있는 타자들을 애정 깊게 응시한 결실들도 많았다. 다음 기회에 더 풍성하고 빛나는 성과가 있을 것을 기대하면서, 이번 응모자 여러분의 힘찬 정진을 마음깊이 당부 드린다.

 

- 심사위원 : 신달자,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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