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상] 노을 격포 / 송의철
물거품 별처럼 이는
노을궁宮 격포 해변에서
웃는 눈물방울 보네.
저 한 송이 석양화夕陽花 앞에서
떠나온 여인은 소리 지르고
고래등 같은 섬 노을 분만하는
인어는 자장자장 하네.
그때, 모래 젖 물고 칭얼대는
거품들 떠밀어 탁아하고
바다의 풍성함에
연연하는 바람에 사로잡혀
파도의 두상들 금관 쓰고 너울춤 추는데
모여드는 해변엔 반짝이는
거품과 거품뿐이네.
날마다 잉태하고 날마다 분만하는
그 마음
몹시 슬퍼서 웃는 눈물 속으로
연한 연미복 입은 금성이
석양화 꽃마차에 노을공주를
태워 떠나네.
그리고
눈물방울 속에서 달이 뜨고 마네.
별들은 자장자장 반짝여라
[우수상] 삐비꽃 / 박윤근
산기슭 중턱에 활자들이 뭉텅 빠져있다
기우는 오후 두 시의 각도에서 지워졌다
식물도감 빨간 볼펜으로 밑줄 친 그 속이다
손톱 밑으로 공복이 하얗게 말려들던 손,
보이지 않는다
직선으로 줄기를 뻗는 습성의 어느 풀은
종내 책등을 넘어 백태처럼 사라졌다
마음의 돌확에 여운이 길지 않았다
구멍에 빠진 저 풀
속지를 넘겨 줄때는 결이 민감해져
오래 변색되지 않는다
하지만 손이 멀어져 상처 난 마음
자간을 지나는 좀 벌레에게는
치명적인 먹잇감이었다
뻥 뚫린 주변에 자라던 개정 향 풀도
끝내 문장들을 잡아주지 못한 손끝이 파랗다
책갈피 사이로 무거운 생각
뼈로 압화 돼간다
향기 없는 꽃이 무슨 죄가 되었는지
입술의 빛깔 지우며 다른 식물의 일가가 된다
결의를 해지한 풀들
어둔 구멍에 웃자란다
오랜 도감의 서열이 바뀌고 있다
[우수상] 난 헌옷이다 / 이명예
철 지난 옷 정리하다가 지푸라기로 변해가는 흰나비를 보았다
아직 통통한 줄무늬 스커트 토라진 모자 단발머리 반바지
그들만의 숨이 거칠게 납작하게 빛을 내고
너덜너덜 실밥 깨진 곳은 어머니 시절엔 밥풀이었을
뿌리 뽑히면 아무것도 아닌
정리되고 싶지 않은 것들이 다투어 줄을 선
한때는 산소 먹고 별을 읽는 싱싱한 혈관을 자랑했다
찢기고 그늘진 날개 운동하고 채식하면 건강한 시계 울리겠지
심장 헤치는 위험은 밟지 말아야 하지
난 흰나비 난 헌옷
침 튀면 발끈 기울어질 허나 손질하면 입을 수 있는
주름 꼬이면 어떤가! 자존심 아직 시퍼런데
시침질 박음질 다툼 서너 겹 준 나이
헌옷으로 입문했으면 당당해야한다
양질의 탯줄 손가락 구분하지 않는 사랑
나는 원본이다
시간의 태를 입고 혈색 좋은
난 헌옷이다.
[우수상] 하늘에 별 총총 / 김대호
길에 피가 묻어 있다
그것은 로드킬 당한 짐승이 마지막으로 내놓은 즐거운 날숨 같은 거
오랜 지병을 앓던 자가 드디어 결심을 한 흔적
피는 길에 착 달라붙어 있다
피 스스로 길을 집요하게 쥐고 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길이 한꺼번에 각혈했을 때
그 압력이 너무 세서 먼 하늘에 가 박혔다
밤이 되면 각혈한 피의 흔적을 볼 수 있다
붉은 피가 너무 영롱하여 반짝인다
길에 묻은 것은 소심한 성격을 가진 피의 잔해
중력을 배반하고 드디어 별이 되지 못한,
소심한 성격 탓에 길을 꽉 쥐고 있는,
짐승의 시간을 살고 있는,
중력에서
원본에서
떨어지라고 바퀴가 짓뭉개도 힘을 빼지 않는다
[심사평]
치열한 예선의 문턱을 넘어 모두 31명의 작품들이 우리 앞으로 왔다. 이들의 작품들은 한결같이, '개성'이라 불러도 좋을, 분명한 시의 기초와 뼈대를 구축하고 있었다. 이들은 신인으로서의 모험과 열정으로 전통과 충돌하기도 하고 각자 자기만의 언어로 개성을 찾아가는 불안을 노정하기도 하였다. 또한, 기성과 유행에 주눅들지 않으면서도 만만치 않은 시선으로 사물을 끌어당기는 능력도 엿보여 평자들을 설레게 하였다. 오랜 작품 읽기와 논의 끝에, 박윤근의 「삐비꽃」外 4편, 이명예의 「난 헌옷이다」外 4편, 김대호의 「하늘에 별 총총」外 4편, 송의철의 「노을 격포」外 5편등, 4人의 작품들을 주목하였다.
박윤근 씨의 「삐비꽃」외 4편은, 내면의 풍경을 반죽해내는 솜씨가 좋다. 특히, 식물도감속 「삐비꽃」을 현실로 불러내는 언어의 감각이 돋보인다. 삐비꽃을 통하여 그는 책갈피 같은 생활의 틈바구니에서 '뼈로 압화'해 가거나, 어쩔 수 없이 쓸쓸하게 '다른 식물의 일가'가 되어가는 삶의 공복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만한 시선으로 사물을 그렇게 깊고 오래 들여다보기가 쉽지 않다. 다만, 그의 다른 작품들은 자주, 자기만의 중얼거림으로 모호한 세계에 머물러 있는 듯했다. 모호한 이미지는 그것이 시의 안이든 바깥이든 머물 곳이 없다.
이명예 씨의 「난 헌옷이다」외 4편은, 건조하지만 단단한 어조로 일상을 풀어낸다. 그의 시들은 크게 꾸미거나 과장하는 법이 없다. 마른 바람이 불어대는 하모니카 소리 같다. 그렇다고, 그런 감정의 틈입이 보이지 않는다 하여, 그의 시들이 사물의 표피만을 건드리고 가는 게 아니다. 「난 헌옷이다」와 같이, 그의 시가 직관으로 빛날 때면, 자주, 정직하게, 삶의 속살을 보여주기도 한다. 다만, 그의 다른 여러 시들은 단조로운 형식에 군말이 너무 흘러넘친다. 때로 말을 내려놓을 줄도 알아야 한다.
김대호 씨의 「하늘에 별 총총」외 4편은, 새로운 서정이다. 분명, 그의 시의 형식은 새롭지는 않으나, 시의 화자들에게서는 시의 새벽을 걷는 설레임이 느껴진다. 투고된 작품들 대부분이 오랜 습작의 흔적이 역력하고 고루 안정된 기량과 시적 완성도도 갖추고 있다. 하늘의 반짝이는 별이, 삶의 각혈로 각혈할 때의, '그 압력이 너무 세서 먼 하늘에 가 박힌'(「하늘에 별 총총」) 것이라는 감각은 예사로운 것이 아니다. 별처럼 반짝인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시의 먼 길을 가기 위해서는 이미 길들여진 매끄러운 말보다는 거칠고 성난 말로 몰아가야 하지 않을까?
송의철 씨의 「노을 격포」외 5편의 시들은, 재미와 익살로 푹, 익었다. 「현고학생顯考學生」, 「노을 격포」,「알 孤 말 孤」등의 시에서 보이듯 말을 부리는 솜씨도 완숙에 가깝다. 신인답지 않게 능청스럽기까지 하다. 하지만, 이런 그의 시들이 거져 얻어지지는 않았을 터, '우주를 소쩍소쩍 읽거나', '우주의 노래를 비의 붓으로 소쩍소쩍 받아 적기까지', 그리고 '별들이 자장자장 반짝'이게 하기까지, 수많은 불면의 시들이 '노을 격포'를 밀물 썰물처럼 다녀가지 않았겠는가.
최종적으로 김대호 씨의 작품과 송의철 씨의 작품을 앞에 놓고 오래 망설이다, 결국, 송의철 씨의 작품을 대상으로 결정하였다. 두 분 중 누구라도 대상의 자격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지만, 시의 처마를 번쩍 들어 올리는 유쾌함이 있는 송의철 씨의 작품에 조금 더 애정을 주기로 하였다. 대상과 우수상에 선정된 네 분에게 축하의 말씀 드린다.
- 심사위원: 정현종 시인, 송찬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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