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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는 말의 기하학* / 유안진

 

 

쉬운 걸 굳이 어렵게 말하고

그럴듯한 거짓말로 참말만 주절대며**

당연함을 완벽하게 증명하고 싶어서

당연하지 않다고 의심해보다가

문득 문득 묻게 된다

 

유리 벽을 지나다가

니가 나니?

걷다가 흠칫 멈춰질 때마다

내가 정말 난가?

 

나는 나 아닐지도 몰라

미행하는 그림자가 의문을 부추긴다

제 그림자를 뛰어넘는 아무도 없지만

그래도 확인해야 할 것 같아

일단은 다시 본다

이단엔 생각하고 삼단에는 행동하게

손톱 발톱에서 땀방울이 솟는다

나는 나 아닐 때 가장 나인데

여기 아닌 거기에서 가장 나인데

불타고 난 잿더미가 가장 뜨건 목청인데.

 

* 파스칼은 팡세에서 는 불타는 기하학(幾何學)이라고 헸다. 그러나 시가 언어의 몸을 지니기 때문에 말의 기하학이라고 정의해본다.

 

** 장 콕토는, “시인은 항상 진실을 말하는 거짓말쟁이다(The poet is a liar who always tells the truth)."라고 했다. 그러나 원전을 못 찾아 그 출처를 밝히지 못한다.

 

 

 

걸어서 에덴까지

 

nefing.com

 

 

[심사평] 끊임없이 眞我를 찾아공초와 맞닿은 세계

 

어둠 속에 묻혀가는 내 나라의 정신을 일깨우고 모국어의 새벽을 열었던 선각(先覺)이시며 무이이화(無而以化)의 구도자이셨던 공초(空超) 오상순 선생이 열반을 하신 지 올해로 50주기를 맞는다. 그 대덕(大德)과 시정신을 기리는 공초문학상 21회 수상작으로 유안진 시인의 불타는 말의 기하학’(시집 걸어서 에덴까지’·2012 6월 문예중앙)를 심사위원 전원 합의로 선정하였다.

 

유안진 시인은 1965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한 이후 한국시의 한가운데서 새 물이랑을 일으키며 특유의 감성과 문체로 서정성의 회복과 시대적 사유의 깊이를 언어로 조탁하여 왔다. 수상작 불타는 말의 기하학은 파스칼의 어록을 인용한 글제로 자아에 대한 성찰을 치밀한 구도로 그려내고 있다. ‘내가 정말 난가?’의 지극히 평범한 스스로에게의 물음에 나는 나 아닌 때 가장 나인데의 대답이 사뭇 공초적(空超的)이다.

 

시인은 시가 무엇인가란 화두를 깨치기 위해 쓰고 또 쓰는 고행을 한다. 그 높은 산맥과 검은 강을 건너서 비로소 만나는 한 줄기 빛! 유안진 시인은 불타고 난 잿더미가 가장 뜨건 목청이라고 정의한다. 공초가 허무혼의 선언에서 다 태워라/물도 구름도/흙도 바다도/별도 인간도/신도 불도 또 그 밖에라고 갈파한 것에 맞닿지 않는가.

 

일찍이 누천년의 현철들이 시를 일러왔으되 그 구경(究竟)을 꿰뚫은 이는 아직 없다. 이 천착(穿鑿)의 오랜 노동으로 손톱 발톱에서 땀방울이 솟는데까지 이르렀음을 본다. 이 땅의 시인들이 경작한 지난 한 해의 수확에서 타고 남은 재 속의 사리(舍利)를 찾아낸 기쁨이 크다.

 

- 심사위원 임헌영·도종환·이근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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