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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고기, 물꼬기 / 유빈

 

 

낱말들을 고르게 쓰다듬다 놓쳐버리는 혀

빈 밥상 위 문법책은 달아나는 발음을 따라잡지 못해요

귀퉁이 까매진 책갈피 사이로

나쨩 해변의 파도가 밀려와요

불고기는 불고기, 물고기는 왜 물꼬기일까요

언제나 고개를 끄덕여주는 선생님 그러나

센터 문만 나서면 불고기도 불고기,

물고기도 물고기, 책에 빨갛게 그려넣은

물결무늬 밑줄들, 어려운 차이들이

행간 사이를 꼬불꼬불 헤엄치고 있어요

발화(發話)되지 않는 더듬이

언제쯤 머리로 말하지 않아도 될까요

계약서를 다 채우려면 얼마큼 부드러워야 하나요

듣기연습을 위해 놓치지 않는 9시 뉴스데스크

화면에 떴다 사라지는 얼굴

전송되지 못한 채 들것에 실려나가는 비명소리

면사포 속에서 하노이 강이 부풀어올라요

방향도 통로도 모른 채 꿈에 젖은 갈매기들

셀 수 없는 물이랑을 넘을 때

순서를 따라 늘어서는 인터뷰 행렬

해본 적 없는 질문들, 나는, 너는…

기름에 잠겨 지글거리는 계란 프라이 한가운데

섬처럼 똬리 튼 노른자 한 알

하얀 거울에 노란 얼굴이 밤낮없이 비춰지고

강변의 모래알들 잊으면 될까요

맘 편히 흘러들 수 있는 틈새는 어디 있을까요

 

 

 

 

 

[당선소감] 시는 펄떡거리며 살아있는 것

 

외출에서 돌아와 얼굴에 폼 클렌징을 묻힌 채 통보를 받았다. 휴대폰을 미처 못 받았는데 곧바로 집 전화벨이 울려서 아, 꼭 받아야 할 전화구나 하는 직감으로 욕실에서 뛰어나왔다. 수화기 너머로 전해지는 소식의 진상을 파악할 무렵, 손에서 뚝뚝 흐르던 물기가 다 말랐다. 이렇듯 대개의 소식은 일상의 아주 미세한 틈을 찢고 찾아온다. 시도 내게 익숙하고 평면적인 일상의 틈을 찢으며 불현듯 다가오는 ‘한 소식’일 터.

 

문턱을 넘다 발이 삐끗하며 새끼발가락이 뭔가에 찔린 듯 통증이 느껴질 때, 또는 몇 층 아래서 열심히 올라오고 있는 엘리베이터의 퉁퉁거리는 소리가 갑자기 시각화되며 아찔해질 때, 시는 온다. 시를 쓰면서도 그런 찰나와의 싸움에 매료당하기까지 오래 걸렸다. 시란 정태적인 것이 아니라, 그렇게 펄떡거리며 살아 있는 것임을.

 

조급해 하거나 자책하지 않고, 의식이 다할 때까지 ‘그저’ 찰나와 싸우고 싶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지금 충분히 호전적이다. 해도, 시라는 소식을 알아보는 눈이 많이 어둡다. 형상적 사유의 겸손과 깊이도 덜 갖추었다. 그래서 눈이 더 밝아지라고, 더 깊어지라고 초대해 주신 줄 안다. 과분하며, 감사하다.

 

그동안 시 쓰는 길에서 함께해 주신 스승님들 얼굴이 떠오른다. 하지만 소리 내어 이름 부르지 않는다. 마음에 도장 찍듯 다시 한 분 한 분 얼굴 생각해 본다. 초면에 성큼 등 떠밀어 주시며 한 획 긋게 하신 심사위원 선생님께도 깊은 감사의 말씀을 전해드린다. 그리고 내가 시 쓰고 있을 때, 가만히 서재 문 닫아 주고 가는, 그래서 많은 시간 나의 바깥에 서 있어야 하는 남편 K씨에게도 정말 감사와 미안함을 동시에 전한다. 이 모든 분들께 최상의 보답은 좋은 시 쓰는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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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정체성 담는 노력 담담히 그려내

 

2012년 무등일보 신춘문예에 많은 예비시인들이 몰려왔다. 효율과 결과만을 요구하는 시대에 시인을 꿈꾸는 이들이 많다는 것은 희망적인 일이다. 보다 행복한 삶을 꿈꾸는 이들의 에너지가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돌려 생각하면, 현재의 우리 삶이 황폐할 대로 황폐해져 있다는 사실의 반증이기도 하다. 오죽했으면 시로 지친 영혼을 위로하고자 했을까? 너나할 것 없이 물질적 욕망에 휩싸여 정신없이 살고 있는 현실을 부정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다.

 

이런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듯, 많은 시편들에서 시적화자가 과장되어 있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징징거리고 있거나, 울고 있거나, 잔뜩 화가 나 있었다. 형상이 아닌 격정의 토로에 매달려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시적 대상과 화자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구체적 형상을 통해 의미를 구축해가는 시편들을 발견하는 기쁨이 있었다.

 

마지막까지 경합을 벌인 작품은 양은정의 '신발을 위한 레시피', 안준혁의 '검은 강의 기록', 유빈의 '불고기,물꼬기' 였다. 우선, '신발을 위한 레시피'는 삶의 내용과 요리를 결합시켜 시상을 전개했다. 시의 바탕에 깔린 삶의 쓸쓸함이 잘 묻어났지만, 이런 상상력은 신선하지 않다는 결점이 있었다. '검은 강의 기록'은 문명비판적인 시각으로 우리 삶의 음화를 잘 표현했지만 주제가 시적 형상을 압도하고 있었다. '불고기,물꼬기'는 이주여성의 삶을 ‘언어’를 통해 형상화했다. 언어로 동화되지 않는 현실의 틈새를 발견하고, 그 틈새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노력을 담담하게 그려낸 작품이었다.

 

세 사람의 장단점을 비교한 결과, 시상을 전개시키는 솜씨나 발전 가능성의 측면에서 유빈씨의 작품에 믿음이 갔고,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당선자에게 축하를 보내며, 앞으로 좋은 시인으로 성장하길 빈다. 아울러 양은정, 안준혁 두 분에게도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심사위원 신덕룡(문학평론가·시인·광주대 문창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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