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란 쿤데라를 생각함 / 고현정
세계 풍물전이 벌어지고 있는 서점 안에
모형 낙타가 탁자 위에 우뚝 서 있다
아무도 들쳐 봐 주지 않는 책들을 풀죽은
그들의 이마를 모형낙타는 측은한 눈빛으로
멈추어 서서는 목에서 가슴까지 곧게 뻗은 털을
휘휘 저으며 둘러보고 있다
권태로운 오후 두 시의 사막을 걷고있던 나는
네 모습에 빨려들 듯 단숨에 다가간다
카멜색의 길고 부드러운 잔등의 털
네 개의 발과 발톱들, 두 눈은 흙빛 플라스틱이다
먼 길을 걸어 오느라 많이 닳아 있다
튀어나온 코와 그 아래엔 구멍은 뚫려있지 않고
정교하게 붓으로 모양만 그려져 있다
그러나 네 개의 다리는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의
사람만이 찾는 책의 사막을 단단히 딛고 서 있다
사막이 만들어 냈다는 등에 솟은 두 개의 혹이 눈물겹도록
의연해 보여 나는 두 손으로 천천히 쓰다듬어 본다
오후 두 시의 도시 사막을 혼자 타박타박 걷고 있는
모형낙타의 메마른 슬픔이 내 손바닥의 무수한 잔금들을 통해
전달되어 심장을 쿵쿵 올려대기 시작한다.
[심사평] 새로움 찾으려는 패기 돋보여
마지막까지 남은 작품은 고현정의 '밀란 쿤데라를 생각함'과 박병준의 '봉천동 山 5번지에 남아 있는 불빛들'이었다.
'봉천동…'은 그 무엇보다 노련한 솜씨를 보여준다. 그 노련함은 동봉한 모든 작품에서 볼 수 있는 특색이다. 그러나 어디서 미리 본 것 같다는 느낌을 주고, 신인다운 패기가 설 장소를 아끼고 있다.
이에 비해 '밀란 쿤데라…'는 노련하지는 않지만 새로움을 찾으려는 정신이 있다. 동봉한 다른 작품들에서 새로움과 패기가 더 나타나지만 작품의 완성도를 생각하고 '밀란 쿤데라…'를 택했다.
우리는 두 작품 중에 어느 것을 당선시켜도 괜찮겠다고 생각했고, 몇번씩 읽고 오래 생각한 끝에 팽팽히 수평을 지키고 있는 두 작품의 촌평에서 '밀란 쿤데라…'쪽을 누르기로 했다.
조재형의 '수평선을 감아올리는 수차', 김종훈의 '냉장고', 조성순의 '느티나무'도 눈을 끄는 작품들이었다.
그러나 동봉한 다른 작품들이 그 시선을 오래 유지하지 못하게 했다. 좀 더 남들과 다른 감각과 생각을 지속적으로 가지도록 노력하면 좋은 재목들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심사위원 황동규·감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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