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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 시편 11 / 고은

 

 

오늘 오만불손의 묵언이던 내가 모처럼 입을 연다

 

나의 고독은

태양의 고독을 안다

그 불타는 고독 이외에는

아무것도 용납하지 않는 고독을 안다

 

나의 고독은

명왕성의 고독을 안다

그 만겁 빙벽의 고독을 안다

그 혹한의 침묵 이외에는

어떤 것도 필요 없는 고독을 안다

 

오늘밤은 상심의 내가 우주의 눈물을 흘리는 밤이다

 

나의 고독은

토성 및 토성 고리의 고독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나도 토성도 허망이다

 

 

 

무제 시편

 

nefing.com

 

 

[심사평] 온 세상 진동시키는 모국어의 숨결

 

오랜 어둠을 깨치고 20세기의 새벽에 우주적 광망(光芒)을 밝힌 공초의 시맥을 한 세기 가깝게도 따르는 이 없더니 공초 탄신 120주년을 맞아 시인 고은이 신작시 607수를 한 묶음으로 사화집 무제 시편’(창비)을 헌정하였다. 강점기, 분단, 전쟁의 질곡과 역경 속에서 고독한 자유인으로 무위이화(無爲而化)의 경지에 이른 선각이요 구도자인 공초의 저 불기(不羈)의 여정 말엽에 동식서숙(東食西宿)을 동행했던 고은의 시의 오름이 오늘에 이르러 어찌 그에 상응하는 것인지 참으로 놀랍고도 신기한 일이다. 본심에 올라온 지난 한 해의 특출한 시집들 속에서 무제 시편은 그 방대함 위에 내뿜은 시정신의 절정에 압도되었다. 한 시인이 생애를 바쳐 써낼 만한 숫자의 한 편 한 편의 시가 모두 측량하기 어렵지마는 굳이 수상작을 뽑아 달라는 요청에 무제 시편 11’을 가려보았다.

 

오늘밤은 상심의 내가 우주의 눈물을 흘리는 밤이다” “나의 고독은/ 토성 및 토성 고리의 고독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나도 토성도 허망이다에 이르러 공초가 일찍이 갈파한 아시아의 마지막 밤 풍경이나 허무혼의 선언의 대구(對句)임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이 고은의 종횡무진, 호호탕탕, 자유분방은 어디가 끝일 것인가. 이 땅의 좁은 울타리를 넘어 사해(四海)에 우리 모국어의 사자후를 진동시키는 그의 거친 숨결이 공초 제단에서 다시 한번 향불로 피어오르리라. “때려죽여도 때려죽여도 시의 땅인이 땅에 태어난 고은의 축복이 여기 있다.

 

- 심사위원 임헌영, 유안진, 이근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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