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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의 전집 / 김건홍

 

 

그 집의 천장은 낮았다.

천장이 높으면 무언가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 했다.

 

그 집에 사는 목수는 키가 작았다.

그는 자신의 연인을 위해 죽은 나무를 마름질했다.

 

목수보다 키가 큰 목수의 연인은 붉은 노끈으로 묶인 릴케 전집을 양손에 들고 목수를 찾아갔다.

 

책장을 만들려고 했는데 커다란 관이 돼버렸다고

목수는 자신을 찾아온 연인에게 말했다.

천장에 머리가 닿을지도 모르겠다고 연인은 답했다.

 

해가 가장 높게 떴을 때 마을의 무덤들이 흐물흐물 무너져 내렸다.

 

목수는 연인이 가져온 책 더미를 밟고 올라서 연인과 키스를 했다.

목수의 입에서 고무나무 냄새가 났다.

 

 

 

 

2020 신춘문예 당선시집

 

nefing.com

 

 

 

[당선소감] 매순간 불확실한 세계무한한 시점으로 포착하겠다

 

어디에서 어떻게 세계와 마주해야 하는지 늘 고민했다. 그런 고민 속에는 내 존재 또한 한 곳에서 정립되리라는 믿음과 동시에 마음 한편에 불안감이 도사리고 있었다. 이는 어쩌면 세대적 감각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어디서 세계를 보고 있는지, 아스팔트 위에 서 있는지, 허공에 떠 있는지, 바다 위를 부유하고 있는지 불확실하고 보이지 않았다. 이는 정작 눈앞에 놓인 세계가 아닌, 나 자신을 향해 있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시를 써나가면서 들곤 했다. 시를 통해 그 방향을 조금씩 틀고 있는 것 같다.

 

시는 내 위치를 때론 작은 의자 위로, 때론 발코니로, 숲으로, 이국으로 혹은 내가 알지 못하는 미지의 곳으로 옮겨 놓곤 했다. 시는 내게 무한한 시선과 시점으로 세계를 포착하는 즐거움을 알려줬다. 내 앞에 매 순간 달리 놓이는 세계에 눈을 돌리겠다. 축복처럼 주어진 현상들과 사물들을 깊고 차분히 감각해 보겠다.

 

부족한 글의 가능성을 믿어주신 심사위원님들께, 부족한 저를 따뜻하게 맞아주신 명지대 문예창작학과 교수님들께 감사 인사를 드린다. 지난 1, 내 시보다 먼저 내 존재를 헤아려주신 김민정 선생님께, 흐릿하게 서 있는 나를 언제나 선명한 곳으로 인도해주신 이수명 선생님께 고개 숙여 감사 인사를 드린다.

 

반짝이는 문학을 위해 함께 분투하는 명지대 원우들과 진심으로 서로의 시를 빚고 서로의 힘이 되어준 시 스터디 의 문우들에게, 마지막으로 그 누구보다 사랑하는 가족, 나 자신보다 한발 먼저 나를 믿고 응원해준 지영에게 감사드린다.

 

 

 

 

[심사평] 문학적 상투성 답습 않는 시적 압축미 돋보였다

 

올해 한경 신춘문예 시 부문은 예년에 비해 응모작 수준이 높았다. 문학적 상투성을 답습하지 않은 새로움을 보여주면서 시적 압축미가 돋보이는 작품을 뽑고자 했다. 특히 고전적인 세계를 다룰 때도 그 고전적인 것이 과거에 묶여 있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향해 열려있는 작품을 뽑고자 했다.

 

당선작을 놓고 끝까지 겨룬 것은 송은유와 김건홍 작품이었다. 송은유의 화분의 위의(威儀)’는 언어를 자기식으로 감각 있게 형상화하는 능력이 수준급이고 자기 내면의 이야기를 하면서도 시대의 풍경들을 그릴 줄 안다는 점이 매혹적이었다. 반면 부분 부분 문학적 상투성을 극복하지 못한 표현들이 아쉽다는 지적이 있었다.

 

숙고와 토론 끝에 당선작으로 결정한 김건홍의 릴케의 전집은 간결하고 압축적이면서도 비의와 상징성이 풍부하다는 점, 열린 서사 구조가 다양한 해석을 가능케 하고 긴 여운을 남긴다는 점이 동봉한 시편들의 편차마저도 금방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 보이게 했다. 앞으로 한국 시의 새로운 지층의 결을 보여주리라 기대하며 흔쾌하게 축하의 말을 전한다. 아울러 모든 응모자에게 심심한 위로의 말을 전한다.

 

심사위원 송재학 시인 손택수 시인(노작 홍사용문학관 관장) 안현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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