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도는 부족 외 4편 / 최재영
말(言)로써 그려진 지도가 있었다
아이의 첫 울음으로 운명의 등고선을 점치고
짐승들의 귀도 처음인 듯 열리던 곳
누대 몸속으로 유전해 온 길이 있어
아슴하니 눈길 닿는 곳까지 획을 그었는지
그들의 생을 축척해도 영역은 가늠되지 않았는데,
몸에 길을 들여 가는 곳마다
부족의 영토는 새로이 확장되곤 했다
보이지 않는 곳에 좌표를 그렸으므로
어디에도 경계선은 없었으므로
간혹 돌아오지 못하는 이들도 생겨났다
그들은 탯줄의 울림으로 지도의 노래를 배우고
가장 먼 별자리에 방점을 찍어
매일 웅장한 족적을 기록했으리라
모든 문명이 부족을 비껴갔으므로
말(言)의 사원을 짓고 탑을 올렸으리라
무지개를 필사하여 후세에 전하기를 수백 번
몸으로만 익혀 온 지도는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말았으니,
태초 아름다운 지도는 멸실되었으니,
이로써 부족은 떠도는 것들의 기원이 되었다
필경사 Ⅱ
필력을 자랑하는 꽃들이
허공에 몇 점 획을 찍는 아침
말 못할 천기를 예감하였을까
누군가는 하늘의 전언을 필사하느라
지상에서 가장 낮은 자세로
도도하고 정교한 문장을 틔우는 중이다
바람의 어수선한 틈을 놓치지 말 것
두려움과 초조함을 감추느라
혹자는 애써 꽃받침을 활짝 열어 젖힌다
오래전부터 그들은 세상의 징후를 기록하였던 바,
기록에는 별다른 기교가 필요치 않다며
담장 밑 그늘만을 꼼꼼히 채록하기도 한다
개화는 이미 밀서가 아닌 평서(平書)인 것
그러므로 꽃들은 쉽사리 서체를 내놓지 않는다
형형색색 눈부신 필력을 드러내기까지
그 미궁을 빠져나오는데 평생이 걸릴 것이다
꽃들은 비밀을 간직한 두려움으로 몸을 연다
일필휘지 내리긋는 격렬한 몸놀림
새로운 필경사가 피어났다는 소식이다
꽃이 말하다
꽃이 열리는 한 시절을 허구라고 하다
봄 그늘에 앉아
무심한 바람이 둥글 펴지고
향기로운 햇살 몇 줌 도르르 구르는 것을 지켜보다
그 아득한 멀미 속을 헤매이다가
끓어오르는 절정들을 그만, 복사하다
꽃의 이마는 늘 신열에 휩싸였으므로
뜨거움 속에서 종종 길을 잃다
매번 허탕만 치고 돌아오는 길은
무수한 통점이었느니,
돌아보니 푹풍처럼 지나왔노라고
지나온 길은 단숨에 지워졌노라고
꽃이 닫히는 시점 또한 눈 멀고 말아
모든 찰나는 숨가쁜 적요에 들다
하여 천 년을 피어있어도 순간이라 기록하다
한나절 봄볕이 붉게붉게 소멸해 가다
그리고 진실에 눈 뜬 자들은 이윽고 말하다
봄은, 오늘 또 몇 번의 허구를 재촉하였는가
꽃들이 기울어가는 봄날을 탁본하여 후일을 도모하다
다시 처음인 듯,
빗살무늬
어제는 짐승의 시간이었어요
오랜 유목을 끝내고
수백 도의 펄펄 끓는 화기를 견뎌냈지요
어쩌다 가끔 순백의 쌀알을 받을 때면
온 몸 황홀해져 전율이 일곤 했지요
숨도 쉴 수 없는 암흑을 지나
날카로운 빗금을 몸에 두를 때까지
수천 년을 감당하기에는
나는 너무 소극적이고 협소하여라
폐허처럼 버려져 있을 때에도
수없이 겨울이 내리고 꽃이 다녀갔지요
그때 이미 소멸의 끝에서 당신을 알아버렸으니,
내게 유적의 냄새를 입히고
빗살 문양을 넣은 이는
자신의 빗장뼈를 갈고 다듬어
아직 오지않은 날들을 벼리었을까요
꿈에도 기교가 필요한 법이라지만
화려한 장식 따위 필요치 않아요
지금도 기원을 찾아 다시 태어나고 싶은
나는 끝이 뾰족한 빗살무늬 토기여요
목련 Ⅰ
창가의 목련이 흔들린다
이쪽을 기웃거리다 나와 마주치자
슬며시 외면해 버리는,
그 파문에 나도 잠시 흔들렸던가
목련의 한 시절이 내게 물들어
모두 북쪽으로만 가고 있나니
내 발걸음도 자연스레 북(北)으로 향할 밖에,
봄볕 몇 줌에도 꽃들의 좌우명은 바뀌나니
바람의 먼 기별에도
나는 자꾸만 눈물샘이 젖어들었으니
내 안의 그늘진 폐허도 한 번은 화들짝 피어날 것이니
나의 짧은 몇 걸음이
네게는 천 년을 견디는 일이어서
피고지는 주어들도 한 계절을 걷는 일이어서
봄날을 건너가는 그의 잔잔하고 기인 호흡이
얼룩처럼 어룽지는 몇 날
목련 안쪽의 세상을 내 더 이상 알 수 없으나
떨어지는 날들도 한 생일 것이니
지금 막 눈 맞추는 순간이
너와 나의 평생이다
이리 뜨거운,
밤새 천둥번개가 요란하였다
내밀한
[당선소감]
다시 새해가 되었고, 여전히 신춘문예의 열병 속에서 응모를 했습니다. 아주 우연히 시작된 글쓰기는 내게 많은 실망과 좌절과 즐거움을 안겨 주었습니다. 수없이 응모를 하고 낙담하는 시간이 길었습니다. 글쓰기의 노고와 번거로움, 그것은 기쁨이었고 환희와 같았으므로 기꺼이 낙방의 슬픔을 감내하였지요. 출 퇴근을 하는 매일의 일상 속에서 내 의식을 차지하는 가장 큰 부분은 바로 ‘글쓰기’였기 때문입니다. ‘글쓰기’의 어려움은 내게는 곧 즐거움에 다름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굴곡을 지나면서 얻어지는 한 편의 ‘시’...... 밤잠을 잊어도 좋을 향기로운 문장을 맞이하는 일은 어쩌면 내 평생의 업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곧 봄이 오는 소리들이 사방에 가득합니다. 이 싱그러운 내음을 향유할 수 있게 해 주셔서 너무나도 행복한 시간입니다. 응모 작품 모두를 당선작으로 한다는 심사방식이 새로웠으나 내 작품에 대한 신뢰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용기를 내어 정진할 수 있도록 어깨 다독여주신 심사위원님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시’가 아니었다면 누리지 못할 호사입니다. 필시 내 다음 생도 시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고 있을 것입니다.
[심사경위]
올해로 여섯 번째인 한국문학방송 신춘문예. 이번 응모자는 260여 명이었다. 예심에서 6인의 작품 30편을 선하였고, 그 30편에 대해 각각 응모자 인적사항(성명, 연락처 등)을 삭제한 다음 무작위로 불규칙 편철했다. 그 후 곧바로 본심으로 넘겼다. 본심은 채점이 종결될 때까지는 심사위원끼리도 서로 누구인지, 몇 명인지 전혀 알 수가 없도록 보안을 유지했다. 또한 집계된 점수에 의거 각 심사위원이 당선자 결정을 인준할 때까지도 심사위원이 누구인지 응모자가 누구인지 밝히지 않았다. 심사위원 전원이 당선자를 인준한 후에야 심사위원과 당선자 및 본선진출자들을 각 심사위원에게 공개하는 방식으로 진행했다. 이렇듯 한국문학방송의 당선자 결정방식은 심사위원간 작품추천 및 토론 형식이 아닌 것이다.
채점 기준은 시행 첫회부터 올해까지 한결같은 기준이 적용됐으며, 각 작품별로 △문법 · 어법 · 표현의 적절성(10점) △주제와 내용의 부합 · 일관성(20점) △감동 · 느낌(20점) △시적구조와 메타포의 깊이(20점) △작품의 신선감 · 독창성(20점) △작가적 역량 · 성장가능성(10점) 등 총 100점 만점으로 되는 구조다.
심사위원은 해마다 전원 교체 위촉함을 원칙으로 하는데, 이번 본심은 문정영 시인, 서상규 시인, 천향미 시인, 김다희 시인이, 예심은 안재동 시인(한국문학방송 주간)이 맡았다.
올해도 당선작에 대한 작품평은 별도로 내지 않기로 한다. 한국문학방송의 신춘문예는 타 신춘문예나 문예지 등과 '차별성(개성)'을 매번 추구한다. 그래서 심사방식도 채점제인 것이다. 본선진출자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도 인비(人秘)키로 한다. 본선진출자나 낙선자 모두의 사기를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끝으로, 이번 신춘공모에 참여해 주신 모든 응모자 제위께 진심어린 큰 감사와 아울러 아쉽게도 낙선된 분들께는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전한다.
― 정리: 안재동 시인(한국문학방송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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