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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성기 / 김수원

 

접시는 바꿔요

어제 같은 식탁은 맞지 않아요

초승달을 키우느라 뒷면이었죠

숨기고 싶은 오늘의 숲이 자라요 깊어지는 동굴이 있죠

전신거울 앞에서 말을 터요

알몸과 알몸이 서로에게

내 몸에서 나를 꺼내면

서로 모르는 사람

우리는 우리로부터 낯설어지기 위해 자라나요

엄마는 앞치마를 풀지 않죠

지난 앨범 속에서 웃어야지 하나, 둘, 셋, 셔터만 누르고 있죠

식탁을 벗어나요

눈 덮인 국경을 넘어

광장에서의 악수와 뒤집힌 스노우볼의 노래, 흔들리

는 횡단열차와 끝없이 이어지는 눈사람 이야기, 말을

건너오는 눈빛들과 기울어지는 종탑과 나무에서 나무와 나무까지 밝아지는

모르는 색으로 달을 채워요

접시에 한가득

마트료시카는 처음 맛본 나의 목소리

달 아래, 내가 나를 낳고 나는 다시 나를 낳고 나를 낳고

내가 누구인지 누구도 모르게

 

 

 

[당선소감] 지금껏처럼 앞으로도 시는 내 편이 아니길

나는 너무 반듯하다. 아버지가 내게 남긴 유일한 유산이다.

 

그런 나를 버리기 위해 지금껏 시를 썼다. 구겨버린 가족사진처럼, 기형적으로 구겨진 사진 속 미소처럼 나는 나로부터 낯설어지고 싶었다.

 

오빠가 죽었을 때, 내 시는 울음 속에서 질척거렸고 아버지가 오빠를 뒤쫓아 갔을 때는 딸꾹질만 해댔다. 죽음은 쉬운 거네, 몇 해 휘갈기는 동안 딸꾹질도 그치고 울음도 그치고, 시가 '곁'이라는 걸 그때 느꼈다.

 

그로부터 나는 나를 죽이는 일에 몰두한다. 내가 곁이 될 때까지.

 

시의 곁에 작은 자리를 마련해 준 부산일보와 심사위원님들께 감사드린다. 뒤늦게 공부를 시작하고 8년, 서두르는 마음을 눌러 준 정봉석 교수님을 비롯한 동아대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교수님들께 감사드린다. 시를 놓지 않도록 독려해 준 선생님들께 고개 숙여 인사드린다. 유병근 선생님이 하루빨리 쾌차하시길 기원드린다. 함께 문학을 찢어발겨 준 벗들과 동아대 글패고갱이들, 그리고 시 앞에서 독해지자던 진수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가족은 나의 무한 동지다.

 

지금껏 시는 내 편이 아니었지만 앞으로도 내 편이 아니길 바란다.

 

 



[심사평] 호흡·이미지, 얽매임 없고 자유로워

올해 응모작들은 폭넓은 시적 탐색을 담고 있었다. 생활의 감정을 담은 시편들은 진정성은 있으되 대체로 상식적이거나 평이했고, 현란한 언어와 이미지를 보여주는 시편들은 수사(修辭)의 영역을 뛰어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사유의 깊이를 보여주는 시들은 삶의 내면과 그 너머를 응시하는 눈길이 매혹적이었으나 미학적 형상화가 부족한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마지막에 남은 작품들은 ‘위시본’ ‘흑백극장’ ‘물사람’ ‘그후’ ‘변성기’였다. 심사자들의 기대가 높았던 탓이었을까?

 

꽤 오랜 시간 숙의를 해야 했다. ‘위시본’은 흥미로운 제재를 입체적으로 펼쳐 내는 상상력을 보여주었지만 다소 현학적이고 사변적이었다. ‘흑백극장’은 간명한 언어와 이미지의 전개가 장점이었는데, 입체적 확산의 힘이 모자랐다. ‘물사람’은 차분하되 정서적 흡인력이 강했다. 잘 익은 서정의 세계를 보여주었으나 소품으로 그친 게 아쉬웠다. ‘그후‘는 남다른 시적 깊이와 인식을 지니고 있음에도 마지막 2행- 결말이 아쉬웠다.

 

‘변성기’는 일견 조금 서툴고 추상적인 시로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계를 낯설게 바라보는 시선이 있고, 자기만의 이야기를 하려는 시도가 있다. 호흡과 이미지도 얽매임이 없이 자유롭고, 상상력의 폭이 크다. 심사자들은 기존의 문법에 익숙한 잘 다듬어진 시보다는 앞으로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시를 선정하기로 했다. 시는 카오스의 세계에서 코스모스를 발견하는 일이라고 한다. 보다 힘찬 모험을 통해 유니크한 시인으로 성장하기를 기대한다.

 

심사위원 박태일 전동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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