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속엔 길이 없다 / 김규진
1
신발을 숨겨버리고
전화도 끊어 버리고
종일 집 속에서 뒹군다.
---일찍이 출근하는 시인은 없었다.
숨 쉬는 것은 오직 나와
베란다의 난초 몇 그루뿐.
내가 뒹구는 집을 꿈꿀 때
이 식물들은 떠나는 길을 꿈꿀까?
집은 하루 종일
수도꼭지로 마시고 솥과 냄비로 끊여내고
변기의 똥구멍으로 쏟아 낸다.
---우리 시대에 '존재의 집'은 철거되었다.
가격의 단지가 서 있을 뿐이다.
몇 개의 길들이 문을 두드린다.
난초잎 두어 개가 흔들렸으나
기척을 느끼지 못한 길들은 이내 돌아가 버린다.
열쇠의 구멍은 언제나 밖에 있다.
지친 나그네만이 그 문을 열 수 있다.
2
기원전 588년
싯다르타는 길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길에서 죽었다.
기원전 4년
예수도 길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길 위에서 죽었다.
행복했으리라
존재의 집마저 짓지 않았던 그들은.
56번 도로
내 가슴속에 영원히 포장되지 않은 길.
칡넝쿨이 엉금엉금 기어 나오는 비포장길을 달리다
낮술을 마신다.
목마름을 목마름으로 다스리기 위해
어데까지 가제예?
난데없는 주모의 물음.
마치 혜능에게 점심을 어디다 두었냐고 물었던 주모처럼.
낮술 때문에 길은 비틀거리고
3
갑작스런 흐드득 흐드득 비
해발 1,300미터 구룡령 넘어가는 길.
비안개는 뿌리고 차는 진창에 빠지고
---차를 버릴까?
나는 아직도 쓸데없는 것들을 너무 많이 가지고 있다.
액셀을 북북 밝으며 간신히 한 굽이 돌아
아, 보았다.
끝도 없이 펼쳐진 연보라색 도라지꽃.
비안개 속에서
수천, 수만의 길을 열고 있던 꽃무리들.
하늘도 언덕도 뭉개버리고
비안개를 타고 놀며 저들끼리 축제를 벌이고 있던 꽃무리들.
함께 비안개를 타고 놀며
교접의 뿌리마저 내던져 버리고 싶던
산비탈의 꽃무리들.
4
모든 길이 걸어 들어간 바닷가
물결에 몸을 맡긴 채 발을 씻는다.
넘어온 수많은 들과 산을 물 위에 띄워 보내며
꽃잎처럼 하나 둘.
또한 마음의 길까지도
아직 나에게도 길이 남아 있을까
나의 길은 아직도 나의 발자욱 소리를 기다리고 있을까?
친구에게 편지를 쓴다.
<시인은 출근하지 않네
집 속에 길이 없네
이리로 오게
이리 와 걸어가세
바다의 밑바닥을.
한 번도 걷지 않은 가슴 속의 황야를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길을.
문화일보 주최 2000년 신춘문예 시상식이 24일 오후 4시 문화일보 갤러리에서 열렸다. 이날 시상식에서 김진현 문화일보 사장은 축사를 통해 “2000년의 새벽을 여는 새로운 작가들에게 큰 기대를 한다. 큰 아픔의 역사가 큰 작가를 만든다. 지난 세기 동안 많은 고통을 겪은 한국의 경험이 뛰어난 작가를 탄생시킬 것으로 믿는다”라고 말했다.
시상식에는 김병익(문학평론가·문학과지성사 대표), 김원일(소설가), 황동규(시인·서울대 영문과 교수), 김화영(문학평론가·고려대 불문과 교수), 이문열(소설가), 감태준(시인·중앙대 문예창작과 교수), 김홍준(영화감독)씨 등의 심사위원을 비롯해서 소설가 이윤기·최성각, 시인 이문재, 문학평론가 김경호· 한기(서울시립대 국문과 교수)씨 등 내외빈 80여명이 참석했다.
수상자는 시부문 김규진(41)씨,단편소설부문 전유선(45)씨, 시나리오부문 최준영(34)씨,문학평론부문 이홍섭(35)씨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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