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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단함을 빠져나가다 외 4편 / 권수찬

 

 

책을 펼친 지는 오래되었다

기록은 닳고 닳아 지루한 자막으로 새어나간다

머릿속이 붉어진 오후,

구석에는 당신이 비스듬한 자세로 흘러내리려 한다

그림자는 한 뼘씩 줄어들고

빈 고시원은 햇살에 부푼 빵처럼 지루하다

 

치자 잎이 창으로부터 쏟아지는 마른 향기

등 뒤에는 죽은 서가의 눈들이

햇발처럼 쏘아본다

자신을 들키고 있다니,

당신은 그 페이지에서 영원히 멈출지도 모른다

기록은 숨이 막혀

고시원 외벽과 비슷하다

 

간신히 화장실 구석에 끼여

담배를 물고 있는 당신은

이곳에서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을 언제부터 했는가

가방에는 지로용지가 구겨져 있다

금요일엔 일용직 근무를 서고

쪽창 밖을 바라보는 당신은

갈수록 욕실 안 거북이를 닮아간다

건너야 할 문마다 단단하다

책은 3페이지도 못 넘어가고

책 속의 깐깐한 주인을 언제 만날 셈인가

 

당신은 이제 묻는다

'삶도 없이 스스로 묶이다니'

고시원 옆문으로 빠져나가는 당신은

습성이 단단함보다 더 치열하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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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입구

 

 

풀들이 허공으로 긁혀 있다 자국 나지 않은 흙들이 갈라져 있고 안개가 먼저 마중 나와 있다 어머니를 지층에 두고 오던 날부터 나의 계절은 오지 않았다 어머니를 찾아가는 길은 차가운 입구를 데우는 일이다 동공이 마를 때까지 말라서 비어버린 어머니의 물집을 터뜨리러 가는 중이다

 

사진 속에는 어머니가 아주까리처럼 심어져 있다 네모난 목재 그늘은 어머니를 딱딱하게 받쳐주고 있다 그날 이버지는 마루 창에 두터운 썬팅지를 붙였으며 포도나무는 다시 어두워지고 말았다

 

난초 잎이 시든 저녁일수록 어머니의 관절은 다시 비틀어지기 시작했다 콘크리트 계단을 무생물처럼 내려가던 아버지, 한동안 감감했다, 어머니의 위태위태한 박음질에서 터져나오는 통증은 절기를 맞은 듯 꺽꺽거렸다

 

벽은 단단해도 악취를 풍긴다는 걸 회색구멍을 통해 알게 되었다 바람은 회색과 가까워지고 겨울의 속도를 조금씩 늘려가고 있다 벽은 굽어질수록 폐허의 냄새로 흘러들어 어머니가 어깨를 기대어도 다정한 온기가 되지 않았다

 

그해 포도나무는 어머니와 함께 싹을 틔우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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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강

 

 

날개를 더듬으며 죽은 새의 새벽 강은 길다

이미 상처의 흔적은 바래졌으며

푸른 공기는 바닥으로 흩어진다

 

저만치 자전거를 굴리고 가는 당신

간간히 스쳐 보내는 전봇대

길 위로 당신의 하얀 미소가 출렁인다

원반 같은 하늘은 머리 위에서 맴돌고

안개 속으로 들어가는 이들은

옆구리에 아리송한 자루를 하나씩 매단 채

깊은 물속처럼 걷는다

 

기억에도 없는 길을 더듬는다

과녁을 좇아가던 그를 한 번도 의심해 본 적 없다

종이꽃 하나 접어 희미해진 행렬에 끼워 넣는다

아련한 향기를 지우러 가는 중이다

텅 빈, 저 문드러진 눈빛을 누가 다독여줄까

 

서늘하게 죽은 바람 하나가

끝내 깊어지는 강변에는

서로의 안부가 몸부림친다

희뿌연 지붕 위로 구름의 일가족이 지나가고

나는 시간의 표면에 흘러나오는

새벽의 울음소리를 듣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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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를 깨우다

 

 

얼마나 많은 기류의 씨앗들이 이리 저리 흘러 다니며

성자의 반열에 오르고 싶어 했을까

그 영혼들이 가여워

침묵은 긴 시간으로 흐르는 걸 거야

새가 담장과 부딪히는 순간

누군가 한 세계를 깨뜨리기 위한 수고로움을 생각하지

소리 없는 정물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나

허공은 바람이 표정이었다는 듯 구름도 빨라지지

작은 연못에는 잎의 말들이 둥둥 떠다니고

언젠가 내 안의 진입로에

그 하나의 빛과 하나의 어둠을 나눌 수 있는

나만의 동심원을 갖고 싶었지

날개가 치솟는 정반대로의 방향인

낮은 파닥거림을 좇아

갈망은 거역할 수 없는 또 다른 부호였음을,

멀리 송전탑 아래로 안개가 밀려나오고

시원(始原)의 바람을 타고 기우는 새

숲은 은빛을 빛내기 위해 순결의 기호를 장식하지

새들이 날개를 벗는 순간

깨어나기를 소망하지

해질녘 꽃들이 니얼니얼 춤출 때

갈잎은 물의 향기를 길어 올리지

알 속에서 웅크리다 부화된 새

신성의 부리들은 부드러운 바람을 모으고

새로운 정념을 일으켜 세워

마지막으로 깊은 눈빛을 그려 넣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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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어 굽는 여자

 

 

밖은 서늘한 바다이다

여자가 문을 나서자 물고기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갈라진 음들이 물살로 퍼져나가는 시간

여자가 그물 옷에 묻은 저녁을 털어낸다

 

지상 이층에 담긴 이력은

은빛 창 말라붙은 비린내가 전부이다

부엌에서는 고등어가 팔딱거린다

고등어의 눈은 굽어진 창을 바라본다

여자가 비린내를 끼운다

 

물 위로 흐르는 뉴스의 화보에는

바람의 흔적이 끊이질 않는다고 한다

여자는 바다 깊은 곳에

유난히 흔들리는 오늘 밤의 달을 그물질한다

창의 화분마다 시퍼런 달빛을 심고

바다의 풍습을 달삭거린다

여자가 엷은 입술로 주문을 외울 때마다

망원경에 씹힌 바다는 더욱 깊어진다

 

여자의 푸념은 곧 줄을 당기기 시작한다

때로는 팽팽하게 때로는 느슨하게

그물 자락 바다 한가운데에 펼쳐 놓는다

달빛에 고등어를 굽는 여자의 하루가 말라간다

여자의 눈빛이 고등어 눈빛을 닮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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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안정된 언어감각으로 풀어낸 아름다운 생의 구체성

  

『문학의 오늘』 제2회 신인문학상 부문에는 실로 많은 분들이 응모해주셨다. 200명 가까운 응모자 숫자에 비추어볼 때 그야말로 매우 커다란 활황을 보였다고 할 수 있다. 두루 알다시피, 우리 시대가 이른바 도구적 이성의 영역이 날로 커져만 가고 있고 그 반대편에 존재하는 미학적이고도 비판적인 이성은 그 활력이 현저하게 줄어들고 있는 시대라는 점에서, 이러한 반응과 열도는 매우 소중한 것이 아닐 수 없겠다. 더불어 우리는 ‘시적인 것’의 예외적 고투를 통해 새로운 미적 비전을 상상하는 것이 여전히 아름다운 저항에 해당하는 경우라고 생각한다. 이를 증명일도 하듯, 매체적 위상이 하루하루 달라져가는 『문학의 오늘』에 그 어느 때보다 가작들이 많이 투고되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흐뭇한 일이라 할 것이다.

 

심사위원들이 끝까지 눈길을 두었던 다섯 분의 작품들은 저마다 자신만의 특장을 드러내면서 오랜 시간의 습작 경험과 안정된 구성 능력을 두루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가나다순으로 이름을 밝히면 권수찬, 김주혜, 윤명식, 이재근, 한인숙 씨의 시편들이었다. 모두 당선자로 뽑혀도 손색이 없어 보였다. 최근 유행하는 담론에 대한 무의식적 추수를 단호하게 거절하고, 스스로의 구체적 경험과 표현에만 집중하려는 경향이 강하다는 점이 매우 고무적으로 느껴졌다. 이 모든 것이 개성과 완결성의 황금분할을 통해 우리 시의 미래를 개척해가려는 젊은 언어들의 긍정적 면모라고 생각되었다.

 

이 가운데 심사위원들은 권수찬씨의 작품들이 비교적 균질적인 데다가 탁월한 언어조직력을 갖추고 있어서, 당선작으로 뽑히는 것이 합당하다고 의견을 모았다. 다른 분들에 대해서는 응모작의 균질성과 언어의 밀도를 조금 더 기다려보기로 하였다. 당선자는 다섯 편 모두 안정된 언어감각과 삶을 바라보는 페이소스가 남달리 결속되어 있는 시세계를 보여주었다. 삶을 살아가는 이들의 다양한 이야기narrative를 선보이는 능력도 모두 좋아보였다. 「단단함을 빠져나가다」 외 4편의 작품은 한 편 한 편의 완성도가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았고, 그 안에 우리 시대의 한복판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힘겹고도 아름다운 생의 구체성이 잘 나타나고 있어서 특별히 반가웠다. 시의 이미지를 구사하는 능력도 탄탄한 훈련과정을 짐작케 하였다.

 

우리는 앞으로 이 시인이 이러한 속성을 좀 강렬하게 언표하여, 자신의 지난날에 대한 성찰의 계기를 부여함은 물론 자신의 현재형을 구성하고 있는 타자들의 다양한 경험을 선명하게 부조해가기를 바란다. 또한 기억을 매개로 할 때, 그것을 자신의 현재 상황이나 감각과 결속하여 생생한 현재형의 언어로 되살아나게 하는데 특장을 가지고 있으므로 이 또한 적극 발전시켜가길 진심으로 바란다.

 

그밖에도 구체성 있는 언어를 통해 자신만의 언어적 성채를 구축하는 경우가 많이 발견되었다. 다음 기회에 더욱 풍성하고도 빛나는 성과가 있을 것을 믿어 의심치 않으며, 응모자 여러분의 힘찬 정진을 당부드린다.

 

심사위원 이경철(시인, 문학평론가), 유성호(문학평론가, 대표 집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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