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버튼홀스티치* / 권성은(본명 권옥희)

 

 

이 길은 올 풀린 기억이 삐져나오지 못하도록 팔순의 노모 허리 꺾어 기역자로 걷는 길이다 따라서 이 길은 더 이상 직선으로 갈 수 없다 불안에서 탄생한 ㄱ은 처음 나온 구멍 근처에서 자주 멈춘다 구멍은 길 위에서 흔들리는 실밥 같은 손짓을 안으로 쟁인다 늘 뾰족한 시간은 구멍을 향하여 한 땀 길 떠난다 마지막 좁은 바늘 길 둥글게 휘돌아 간다

 

기역에서 기억으로 난 길이 춥다 더 이상 갈 수도 없고 멈출 수 없는 매듭의 위태로운 실의 시간을 허리 굽은 늙은 겨울이 걸어간다 최후의 바늘이 단추의 목을 감싸는 순간 길은 기억으로 둥글게 말린다

 

그러므로 길 위에서 바늘의 행방을 묻지 말 것 마지막 길을 떠나는 허기진 물음표들, 억압과 자유, 셀 수 없이 많은 고통의 순간이 찾아와도 언제나

 

구멍을 향하여 바늘로 질문하는 한 땀의 생

 

구멍은 늘 춥다

 

*버튼홀 스티치 [buttonhole stitch] 주로 단춧구멍이나 가장자리의 실이 풀리는 것을 막기 위하여 휘갑쳐 뜨는 방법

 

 

 

 

[당선소감] 시는 고통의 계곡을 나는 한마리 붕새

 

낯선 선물인 듯 불쑥 당선 전화를 받았던,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둔 그 날이 제게는 꿈처럼 아련합니다.

 

정말 이제 기뻐해도 되는지 제 자신에게 되물었습니다. 저도 모르게 흐르는 눈물의 행간에서, 무려 열여덟 해 전 어느 신춘문예 심사평 귀퉁이에서 보았던 제 시의 주소가 떠올랐습니다.

 

그 이후 저는 NGO활동을 하면서 시 쓰기는 사치라는 오만에 빠져 시와 멀어졌습니다. 쉽게 잊혀질 줄 알았던 시가 제 옆구리를 찔러댈 때면 사회정의 가치실현을 핑계로 제 게으름을 정당화 하였습니다.

 

그러다 2006년에 NGO 단체 대표님으로 원로시인 여민 이기형 선생님을 모시게 되면서 시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시와 함께 세상의 부조리를 외칠 수 있음을 몸소 증명해 보여주셨습니다. 존경하는 선생님, 다시 한걸음씩 시를 향하여 발걸음을 옮기는 제 부족한 마음의 행간을 보고 계시는지요?

 

시는 제게 끝없는 상상의 날개를 달고 험한 고통의 계곡을 날고 있는 한 마리 붕새입니다.

 

지금 광장에서는 수많은 촛불이 어둠을 향하여 정의를 외치고 있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시를 쓰고 읽어야 할 시대입니다. 지속되는 불면과 반성의 겨울 밤, 그 고통과 극한의 사막에서 뜻밖에도 당선이라는 오아시스를 만났습니다.

 

먼저 부족한 시에 힘을 실어주신 무등일보사와 심사위원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아울러 언제나 시를 놓지 않도록 질책하며 지도하여 주신 박남희 교수님과 동국대평생교육원 일산캠퍼스 행복한 시창작반 교실 아름다운 문우님들, 그리고 고양작가회의 여러분들과 2017년 탄생 100주년을 맞는 통일시인 이기형 기념사업회 여러 선생님들께 감사드립니다.

 

무엇보다도 구순의 나이에도 어린 아이처럼 함께 기뻐해 주시는 하회댁 울 어무이와 가족들, 여리고 철없는 에미를 묵묵히 감내해준 소중한 아들, 멀리 타국에서 열심히 응원하여 주는 착한 딸내미에게, 한없이 고맙고 사랑한다는 말을 전합니다.

 

 

 

 

애드픽 지식마켓

 

deg.kr

- 애드픽 제휴 광고이며, 소정의 수수료를 지급 받을 수 있습니다.

 
 
 

 

[심사평] 참신한 시적 발상과 사유의 깊이가 돋보여

 

지난해는 비상식적인 인간들의 국정농단으로 현실이 문학보다도 더 많은 상상력을 요구하는 요지경이었다.

 

그럼에도 올해 신춘문예에는 그 어느 해보다 많은 작품이 접수되었다. 시 부문만 해도 응모자가 250여명, 투고작이 1천이 넘었다. 투고작이 는 것은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비정상적인 시대상황이 반영되어 있는 것 같아 마냥 기뻐할 수만 없는 노릇이었다.

 

응모작 중에서 마지막까지 선자의 손에 남은 작품은 「일기예보」, 「아버지의 못」, 「버튼홀스티치」 등 세 작품이었다.

 

「일기예보」는 장마가 온 어느 여름날의 추억을 노래한 시로 “가난이 갈라진 벽의 각막을 적셨다”와 “라디오의 안테나가 연신 기침을 해댔다”와 같은 감각적인 표현은 뛰어났지만 주제를 집약하는 힘이 부족하고, 시적 이미지를 만드는데 있어 너무 산문적이라는 점에서 언어의 절제력이 아쉬웠다.

 

「아버지의 못」 은 도배하는 날 낡은 벽지에 드러난 선명한 ‘못자국’에서 시상을 발아하여 ”허름한 점퍼와 바지“가 걸린 못에서 ”아버지의 날지 못하는 날개“을 발견하는 깊은 통찰을 보여 주었다. 일상에서 시적 대상이나 상황을 발견하는 힘이 좋고 시상전개도 안정감이 있어, 시인으로서 충분한 역량을 갖추었으나 화법과 언어의 새로움이 부족하여 오랫동안 망설이게 했다.

 

「버튼홀스티치」는 단춧구멍과 바늘땀을 통해서 삶의 비의를 읽어 내는 참신한 시적 발상과 시적 대상을 유심히 관찰하는 사유의 깊이가 돋보인 작품이다.

 

일상의 소재인 실과 바늘과 단춧구멍이 여러 겹의 언어의 층위를 이루면서 다양한 의미를 함의하고 있어 이 시를 읽는 동안 한 겹 한 겹 껍질을 벗기는 언어의 맛을 느끼게 한다. “최후의 바늘이 단추의 목을 감싸는 순간 길은 기억으로 둥글게 말린다”나 “ 구멍을 향하여 바늘로 질문하는 한 땀의 생”에서 보여주는 감각적 언어와 삶에 대한 깊은 통찰을 높이 평가하여 이 작품을 당선작으로 선정하였다.

 

심사위원 김경윤 시인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