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상] 구두를 벗다 / 최은묵
수염은 뭔가 말을 하려고 밤새 입 주변에서 자랐다 아이는 면도기 속에 수염을 먹고 사는 곤충이 살고 있다고 말했다 전기면도기 보호망 속에서 먼저 살았던 부스러기들을 하수구에 털어낸다
어제 짐을 싸던 손에 청하던 김 과장의 악수는 어색했고, 오늘 구두 대신 아내 몰래 신은 운동화 밑창이 그러하다
발바닥이 낯설다 버스정류장은 운동화로 바뀐 걸음을 알아보지 못했다 정류장을 지나 전에는 열려있었을 하천을 걸었다
굴속을 흐르던 아침이 한꺼번에 입 냄새를 쏟아내는 복개가 끝난 하천 수풀 옆 은밀히 따뜻했을, 버려진 좌변기가 더럭 구멍 난 옆구리로 방귀를 뿜는 중년의 끝자락
살을 비집고 나온 수염이 말을 한다 아내가 듣기 전에 전기면도기에 살고 있는 곤충이 토독토독 수염을 먹어치운다
[우수상] 달전을 부치다 / 신혜경
달전을 부칩니다
신혼 때부터 즐겨 먹던 것입니다
애호박을 썰어 부친 것을 달전이라 합니다
달처럼 둥글다고 해서이지요
비탈진 언덕 호박꽃 같은 신혼집에서
벌처럼 붕붕대며
늦은 저녁과 함께 부쳐 먹곤 했습니다
남편은 달전을 먹으며
호박처럼 둥글둥글 살아가자고 했습니다
보름달처럼 환하게 살자고도 했습니다
달덩이 같다는 말은 때대로
뚱뚱하다는 말로 들리기도 하는데
내 얼굴이 보름달 같아 다행이라 생각했습니다
어둡고 험한 삶의 언덕 더듬더듬 넘을 때마다
달전 부쳐놓고 남편을 기다립니다
하늘이 달을 띄워 밤길 열어주듯
밥상가득 달을 띄웁니다
사시사철 애호박이 있어 든든합니다
여름 한철 나던 것보다 맛은 덜하지만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달전을 부칠 수 있으니까요
사는 일이 호박덩굴처럼 엉켜버린 오늘은
그믐입니다
시장에서 가장 잘 생긴 애호박을 골라
이 어둠 밝힐 달전을 부칩니다
[우수상] 당진형수사망급래 / 이종성
내 눈물은 배롱나무꽃이다.
누군가에게 영혼을 바쳐본 이는 안다.
마음이 마음을 지나면 그 색으로 물이 든다는 것을,
내게도 안팎으로 곱게 물들던 시절이 있었다.
유년의 바깥마당 환하게 핀 나무 아래로
꽃이 되어 걸어 들어온 사람 있었다.
그날부터 뭉실뭉실 하늘에는 꽃구름이 일었고
산 너머 종달새는 보리밭을 푸르게 일으켰다.
밤에는 별을 따라 반딧불이 어둠을 날았다.
마음이란 그렇게 하나의 삼투현상이어서
색깔이 바뀌고 날개를 달아주는 신비한 현상
처음으로 그때 한 사람의 색으로 치환이 되었다.
그 후로 나는 세상의 어느 색으로도 물들지 못했다.
지금, 형수님 산소엔 배롱나무꽃이 한창이다.
간밤 비에 젖은 봉오리 뚝뚝 지고 있다.
아직도 떨리는 손에 든 한 통의 비보
글씨 위로 꽃잎이 붉다.
[우수상] 폭설 / 이명윤
큰 눈이 왔다
한 소년의 눈망울이 적설량을 재고 갔다
새벽부터 눈을 치웠다 삽에 담긴 겨울이 무거웠다 개 한 마리 흥에 겨워 따뜻한
똥을 누고 갔다
잠시 후 아이들이 눈을 끌고 다녔는데 눈이 배꼽을 드러내고 희게 웃었다
하루 내내 눈을 치우고 안전표지판을 바로 세웠다
다음날, 무슨 일이 있었느냐 능청스럽게 白雲을 문 하늘의 입 언저리가 새파랗다
뭐라고 한마디 해야겠는데
파란 바람에 그만 눈이 시려와 그만두기로 했다
보험설계사가 웃으며 새 달력을 건네준다 물끄러미 마흔과 조우했다
깜박 잊고 있었던 봉투를 찾아 들었다
우체국 가는 길, 일그러진 표정의 잔설이 자꾸만 발등에 올라탄다 골목을 돌자
등 뒤로 개 짖는 소리 따라 걷기 시작하고
소리는 점점 눈 뭉치처럼 커져만 가는데
세탁소 이층집 창가에서 바라보던 아이, 눈이 마주치자 쿵, 커튼을 내린다
눈두덩에 잔설이 떨어진 것은 우연일까 곁눈을 뜨자 가로수가 무거운 팔을 든 채
멀뚱 쳐다본다 고개를 든다
글썽글썽 눈구름이 참 곱다,
곱다-라는 방울소리가 머릿속을 환하게 굴러다닌다.
[심사평] 현대시는 상황시이다
현대시는 상황시이다. 서정적인 경향이 강하다 할지라도, 보다 깊이 그 시적 렌즈를 들이대면 입체적이며 구체적인 상황시이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러한 점이 현대시의 목숨이며, 모더니즘적인 시들 이전의 낭만주의적이거나 또는 상징주의적인 시들과 다른 점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러한 현대의 많은 상황시들은 극사시極私詩에서 출발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극사시는 개인의 극점極點에 서 있는 시다. 개인의 극점에 있는 ‘거기’, 즉 아무도 도달하지 못할, 아무도 건드리지 못할 ‘거기’에서 출발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위의 용어들에 대하여는 강은교의 무명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5(서정시학 소재)를 참조하시길.]
그러나 진정으로 좋은 극사시는 순간적으로 그 ‘거기’-개인적인 의미가 강한 ‘거기’-를 넘어서서 초극사시超極私詩가 된다. 그리고 그럴 때에야 한편의 시의 울림은 읽는 이의 공감을 이루어낸다.
따라서 심사는 이러한 상황시의 초극사시적 울림을 조금이라도 울리고 있는 시에게 이번 응모시들 중 가장 우수한 시에게 부여되는 대상을 부여하자는 원칙을 세웠다. 그리고 이러한 심사원칙과 함께 상상의 틈, 진정성, 필연성 등 현대시에 필요한 제반 시적 기준을 적용하여, 몇 번의 독회를 거쳐 시를 걸러내었다. 그리하여 마지막 심사까지 남은 작품들은 ‘달전을 부치다’, ‘폭설’, ‘당진형수사망급래’, ‘구두를 벗다‘의 네 편이었다.
심사자들이 이들 네 편을 가지고 다시 논의한 결과 ’달전....‘과 ’폭설‘의 경우엔 그 시적 표현의 능숙함에도 그 시적 상황이 단선적이어서 입체적 상황시를 이루고 있지 못할 뿐 아니라, 아직 극사시에 깊이 머물고 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당진형수사망급래‘는 그 시적 상황의 진정성이 심사자에게 읽는 순간 약간의 감동까지 주었으나 그 시적 ’틀‘이 아직 상투성에 머물고 있는 점이 많으며 따라서 그 극사시적 울림이 가지고 오는 진정성도 초극사시적 울림으로의 강렬한 폭발음을 내지 못하고 있어 신인다운 신선한 감동을 주지 못하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따라서 대상은 ‘구두를 벗다’의 시로 결정되었다. 이 시에는 입체적 상황이 있으며 초극사시로 가려는 몸짓이 아직 완전치는 못하나 신인다운 강렬함으로 울리고 있다. 앞으로의 대성을 바란다. 문단에서 큰 별로 조우하기를.
- 심사위원 정희성, 강은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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