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로쇠 옆구리 / 김정애
뚫어야만 다스려지는 상처가 있다
뭉툭한 옆구리에 핏물을 가두고
거친 호흡으로 살아가던 나무가
잎사귀의 언어로 조용히 말을 걸어올 때
꿈의 밑동에서 올라오는 것이 있었다
세상에 저문 울음들을 끌어안고
복수腹水를 다스리는
노모의 시간
살갗 밑으로 가는 뿌리가 자라나고
산을 들어 올릴 듯 무거워진 몸으로
때론,
내 것의 체취도 조금은 빼내고 살자며 옆구리를 들춘다
콸콸콸 쏟아내는 물속에는
어머니의 깊은 한숨과 불면의 시간들이 우러나 있고
혈관을 따라 울려 퍼지는 피의 음악이 스며 있어
꿀떡 삼킬 순간을 놓치고 숲에 안겨본다
바람을 휘저으며 폭포를 향해 뻗어가던 기상과
쇳물을 다스리는 철의 여인 같던 고집이
명치 한복판을 뚫고 뼈의 무늬로 흐르고 있다
우글거리는 잎사귀를 향하여
응달을 다스리고 있다.
[당선소감] "깊은 한숨과 불면의 시간을 밝혀주는 새해 첫날 같은 시 쓰고 싶어"
한 그루 나무가 제 가슴속에 부리를 묻고 있는 아침, 옆구리를 들추는 노모는 싱싱한 잎사귀를 어루만지며 가슴속에 살고 있는 바람들을 놓아 주고 몸을 바꾼다.
오래 쳐다 본 그 나무, 그늘을 베풀어 주고 답답할 때 말 걸어 주던 그 나무,
나무가 새의 몸을 빌려 울듯 노모의 몸을 통해 더욱 단단해진 뼈의 무늬를 만들면서 어둠을 다스렸고 생각이 깊어지고, 가슴에 멍이 든 이름들을 불러 보았고 이른 봄날 혼자 착해지기도 했다.
미칠 듯 기억 하나 꺼내 들고 물소리보다 먼 세월을 바라보는데 쉼 없이 어루만졌을 물의 손바닥에 굳은살이 박혀있다. 물살의 굳은 흔적으로 깊은 한숨과 불면의 시간들을 밝히고 오랜 응달의 시간을 다스리는 새해 첫날 같은 시를 쓰고 싶다.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가는 이웃 같은, 그래서 더욱 살가운 시를 쓰고 싶다.
생각나는 얼굴들이 많다.
빈약한 시를 올곧게 붙들어 주신 심사위원님, 방향 없이 헤매는 것들을 가능성으로 옷 입혀주신 스승님, 시 쓰기에 한 없이 게으르다 싶으면 울컥 해질 때까지 껴안아주고 함께 위로 받던 문우들, 청춘의 소리를 가슴으로 새겨듣겠다는 소리와 민철, 가까이 있으면서 먼저 좋아하고 기뻐하는 가족들이 겨울햇살처럼 환하게 다가온다. 쓰자마자 휘발되는 것 말고 뭉근히 피어나는 시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달려가 볼 참이다.
[심사평]
올해 무등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에 투고된 작품수는 400여 편이 조금 넘었다. 전국 각지에서 응모한 120여 명의 예비 시인들의 작품을 읽는 일은 흥미롭고 긴장되는 일이기도 했다. 그러나 투고된 작품들은 아직도 시가 개인적인 고백의 양식이라고 생각하거나 낭만적인 감정의 표출 정도로 생각하는 구태의연한 시들이 많았다. 또한 어느 정도 수준을 유지한 작품들도 대체적으로 발상 자체가 보편적이거나 산문적인 경향이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익숙한 사물을 낯설게 보게 하는 경험을 선사해준 좋은 시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언어적 세련미나 시적 완결성보다는 시적 치열성과 참신성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시란 삶과 현실에 대한 성찰과 열정의 산물이다. 시적 치열성이 없이는 좋은 시가 나올 수 없다. 사소한 일상에서 구체적으로 시를 발견하는 시적 상상력이 돋보이는 작품들이 좋았다. 그 중에서 마지막까지 남은 작품은 최재호의 '자두나무 변성기', 김재홍의 '빈센트 반고흐의 낡은 구두 한 켤레', 김정애의 '고로쇠 옆구리' 였다.
세 작품은 모두 시적 역량이 뛰어나고 다년 간 습작기를 거친 흔적들을 느낄 수 있었다. 우선, '자두나무 변성기'는 꽃 피는 자두나무와 사춘기 소년를 비유한 작품으로 감성이 풍부하고 '햇살 한 무리 잉태한'이라든가 '우람한 목피 속에 바람의 숨결' 같이 언어를 다루는 솜씨가 세련됐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의미구조가 모호하고 주제의 응집력이 약하다는 것이 흠이었다.
그리고 '빈센트 반고흐의 낡은 구두 한 켤레'는 고흐의 그림에서 모티프를 가져온 작품이다. 낡은 구두를 통해 삶의 애환과 삶의 무게로 인한 고통를 노래하고 있는데, 그림이 주는 이미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한계를 보였다. 또 시상을 끌고 가는 힘이나 언어 구사력은 뛰어난데 알맞은 내용을 알맞은 분량으로 압축하는 절제의 미덕이 아쉬웠다.
마지막으로 '고로쇠 옆구리'는 고로쇠 나무를 '세상에 저문 울음을 끌어안고' 살아온 어머니의 삶에 비유한 작품으로 자신의 삶의 주변에서부터 우러나온 경험을 형상화하는 시적 능력이 뛰어났다. 평이한 시어로 삶에 대한 깊이을 들어내는 깊은 안목을 가지고 있으나 마지막 부분에서 긴장이 좀 풀린 감이 있었다.
이 세 작품을 갖고 숙고한 결과 최종적으로 김정애의 '고로쇠 옆구리'를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구조의 완결성 면에서 다소 부족한 점은 있지만 함께 응모한 '섬진강을 굽다'와 '꽃잎을 번역하다'에서 보여준 뛰어난 언어감각과 사물과 삶에 대한 이면을 성찰하고 탐색하는 태도가 녹록하지 않음을 높이 평가하기로 했다. 좋은 시를 당선작으로 뽑게돼 기쁘다. 보다 치열하게 정진하여 한국문단을 빛내는 좋은 시인이 되길 바란다.
끝으로 최재호, 김재홍 두 분께도 격려를 보내며 아름다운 미래가 있기를 기원해마지 않는다.
심사위원 김경윤 시인·광주·전남작가회의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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