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사나무는 나를 지나가고 나는 산사나무를 지나가고 / 조정인
지금은 산사나무가 희게 타오르는 때. 나여. 어딜 가시는지? 산사나무는 나를 지나가고
내가 나를 경유하는 중이네.
흰 터번을 쓴 어린 수행자 같은 산사나무 수피를 더듬는다. 내가 나를 더듬고 짚어보고 헤아려 보듯. 나는 재에 묻혀 움트는 감자의 눈, 움트는 염소의 뿔, 움트는 붉은 승냥이의 심장, 봄 나무가 내민 팥알만 한 새순, 겨울 끄트머리에 걸린 시샘달* 방금 운명한 망자의 움푹 꺼진 눈두덩, 생겨나고 저무는 것들 속에 눈뜨는 질문. 나여, 나는 어디로부터 나를 만나러 산사나무 하얗게 타오르는 이 별에 왔나?
어제 나는 스물일곱에 요절한 나를 조문하고 왔네. 꽃 같은 얼굴이 웃고 있는 영정 앞에 예를 갖추고 향을 피우고 한 송이 애도를 놓고 왔네. 나는 나의 빈궁한 유배처, 나의 고적한 유적지, 불탄 폐사지, 내가 나를 답사하고 탐사 중이네. 휘돌며 흰 보선발을 들어 춤도 춰보네. 나는 파장한 거리의 불 꺼진 상점들. 나는 나의 목 쉰 장사치. 나는 나의 홍등가. 내가 나의 창부, 거간꾼이라네. 그렇다면 나여. 끝내 나의 무엇으로 나는 남으려는지? 나는 나의 번다한 그 모든 혼란과 혼돈. 일생 나를 따라다니며 명치끝을 건드리는 생각이라는 뿔로 한 줄 문장을 쓰는 나는 고작 나의 가냘픈 질서, 나는 오늘도 문득, 태어난 일의 기적을 사네. 나라는 가능성을 사네.
둑길에는 어린 산사나무가 한 광주리 꽃을 피웠네. 산사나무라는 해당화라는 이름에 묶인, 나무라는 꽃이라는 색(色)의 배열을 지나네. 몇 걸음 가다보니 못다 핀 꽃망울이 달린 채 부러진 꽃가지가 던져져 있네. 나는 찢겨져나간 나를 지나치지 못하네. 꽃가지를 주워 둑길을 걷네. 지난해 봄빛이 되비치는 둑길, 나는 나의 전생과 후생을 주워 둑길을 흘러가네. 빛과 그늘이 출렁이는 유리, 혹은 유리의 안쪽을 물고기들의 유영처럼.
산사나무는 나를 지나가고 나는 산사나무를 지나가네. 하나의 어항을 쓰는 두 마리 물고기의 동거처럼.
본 공모전에 당선된 작가께서 출간한 시집을 소개합니다.
김해시는 제1회 구지가문학상 수상작에 조정인 시인의 ‘산사나무는 나를 지나가고 나는 산사나무를 지나가고’, 가야문학상 수상작에 손성자 시조시인의 ‘가야의 거리’가 선정됐다고 8일 발표했다.
구지가 문학상을 선정한 심사위원단은 조정인 시인의 작품이 “근원적 마음의 생태학을 통해 ‘역동적 고요’를 자신만의 시적 자산으로 안아들이고 있으며 오랜 시간 다져온 근원적 역리를 공들여 사유하고 표현했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이번 수상으로 상금 1천만원을 받게 되는 조정인 시인은 1998년 창작과 비평으로 등단해, 시집 ‘사과얼마예요’, ‘장미의 내용’, ‘그리움이라는 짐승이 사는 움막’ 등을 집필했으며 제14회 지리산 문학상, 제9회 문학동네 동시문학상 등을 수상한 바 있는 시인이다.
가야문학상을 수상한 손성자 시조시인의 작품은 “단정한 정형 미학에 ‘가야’의 역동성과 잠재력을 상상하게 하는 서정적 언어를 갈무리한 결실”이라는 평을 받았으며 이번 수상으로 상금 5백만원이 주어진다.
손성자 시인은 ‘망덕포구’로 경남문학 시조신인상을 수상한 바 있다.
제1회 구지가문학상은 대한민국에 현전하는 가장 오래된 발상지 문학인 구지가의 문화사적 의의를 고취하고 문학의 저변확대와 역사문화도시 김해를 널리 알리기위해 김해시가 주최하고 한국문인협회 김해지부가 주관하며 NH농협은행 김해지부가 후원하고 있다.
김해시의회 사회산업위원회 위원장 하성자 의원의 발의로 지난 5월 ‘김해시 구지가 문학상 운영 조례’를 제정했으며 구지가 문학상 운영위원회를 구성해 제1회 구지가 문학상 공모 계획을 의결했다.
공모기간 동안 구지가 문학상에 810편, 가야문학상 260편이 접수됐으며 예심, 본심을 거쳐 구지가 문학상 운영위원회 심의를 통해 수상작이 최종 결정됐다.
시관계자는 “올해 처음 개최된 구지가 문학상이 역량있는 작가들의 참여로 힘찬 출발을 할 수 있었다 앞으로도 구지가 문학상이 권위있는 문학상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