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문학상/근로자문화예술제

제29회 근로자문화예술제 문학부문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로 2020. 9. 23. 22:23
728x90

 

[금상] 가로등이 눕는 길 / 김수구

 

길눈이 어두워지는 날에는

가로등이 굽어 눕는다

눈이 내릴 것 같은 찌뿌등한 밤도

날밤 하얗게 지새우던 철길에서도

가로등은 굽어 있었다

한가위 보름날 숙맥같이 봇짐 지고 달밤을 등질 때도

서늘한 불빛을 부비며

나를 바라보는 파르스름한 눈빛이 굽어 있었다

환하게 웃다가 찡그리다가 겁주는

어두운 골목에서 장승처럼 버텨주던

대설대처럼 곧기만하던 할배 가로등은 가고 없지만

이 세상에서 진정으로 슬픈 것은

이 밤을 홀로 태우는 것이 아니라

어두운 바닥에서 고독을 키우는 일이다

철길에 서서 백발 길게 늘어트리던

동네 어귀 할매 가로등이 뽑혀 상여 지고 가던 날

어머니는 등이 굽어 미라처럼 빠시시 말라있었다

풀밭에 귀뚜라미 소리조차 가을 언덕을 찾아가건만

눈물이 있어도 떳떳이 드러내 보이지 못하는 얼굴

이 세상 어디에다 대놓고 실컷 울 수 있으랴

 

 

 

 

 

 

 

[은상] 옥탑방에 사는 그 노인 / 남태현

 

햇빛이 창틀에 자글자글

파리떼같이 들끓고 있다

일감이 떨어진 지 꽤 오래일거라는

생각이 들 즈음

독촉장, 고지서 이런 것들이

부엌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서서

겨울 왔다고 부고장처럼 알린다

방 한 켠

노인의 행방이

발 묶인 신문지 활자 속으로 겹겹이 포개져있고

누군가 수소문한 흔적이 도배지에

문신처럼 박혀 있다

 

일감을 구하러

문을 열고 나갔을 때

문틈으로 들어 온 세상의

바람과 함께 돌아 온

그 노인의 옥탑방에

불빛이 들 즈음

나는 어둠을 밀고 나오는

등 굽은 개똥벌레 한 마리 보았다

 

 

 

 

 

 

[은상] 장미꽃의 절정 / 이형철

 

늦은 오후를 구워낸 석앵이 누워있다

핑크빛 가슴이 뭉게뭉게 올라와

몸체 향기 따라서

마음의 살을 섞었다

 

온몸의 물기는 아래로 밀어붙이고

빨갛게 익은 입술을 문지르자

선홍색 부끄러움이 하얗게 피었다

 

나무로 옮겨가던 새 한마리

말없이 화단에 내려와

긴 그림자 숨기고서

촉촉한 사랑까지 가슴에 담는다

 

꽃술에 향기가 베어난 곳

원형의 미끄러운 액체가 스며들 때

통통하고 키가 큰 잠자리는

좔좔 흐르는 물속에

단단한 몸체를 밤개워 담근다

 

 

 

 

 

 

 

 

[동상] 빈 집 / 이미화

 

하기 싫은 이애기가 하고 싶어질 때면

누구나 꼭 한번 가고 싶은 곳이 있습니다

떠나온 첫사랑에게 때늦은 사과를 하려는 듯

빗장 걸어둔 문을 서성이다

언젠가 심은 나무의 그림자가 벽을 넘어

발끝에 닿았을 때까지도 몰랐습니다

 

작은 문틈 사이를 비집는 햇살

늘 그 안에 있는 듯 훔쳐보다

먼저 열어 줄 어떤 이를 한참을 기다려 보지만

끝내 하고 싶었던 이야기조차 잃어버리고

두드리지도 못한 채 돌아서는 길

꽃이 진 빈 들녘만이 괜스레 야속하기만 합니다

 

왜 기다리는 것은 더디 오고 서둘러 가는지

도배지 풀물 바진 얼굴 위로

까치발 산행하던 봄꽃은 지고

오래된 도마의 등짝같이 움푹 패인 가슴에는

마르지 않는 빗물만 고입니다

 

그 집에 동거하던 사람들의 문패를 떼어내고

낡은 벽장에 남겨둔 새 한마리마저 날려 보내고서야 알았습니다

꽃은 봄에도 진다는 것을

 

 

 

 

 

 

 

[동상] 이발 / 문호곤

 

양철세숫대야 온천수처럼 뜨뜻미지근한 물이 고이면

할아버지는 살구빛 보자기를 펼쳐 소년의 목에 두릅니다

 

아이의 심장은 붉은 색 달맞이 꽃으로 밤에 다시 피어나 파닥거리고,

낮동안 잠들었던 청각은 할아버지의

물살 젖는 소리를 낚시하듯 숨죽여 따라갑니다

 

졸음에 겨운 소년의 머리가 스삭스삭 가위질의 리듬을 맞춰

연신 아래로 방아를 찧을 때 달빛을 오려내던 가위질 소리에

감나무잎 하나 조용히 잘려나가 소년의 어깨 위에 살며시 내려앉지요

 

커피전문점의 풍만하고 부드러운 생크림마냥 소년의 목덜미에

비누거품이 철퍼덕 발라지고 할아버지의 새치머리를 닮은

낡고 무디어진 면도날이 눈위를 달리는 자전거가 되어

유연하게 길을 만들어 낼 때

 

아이야 잠들었다간 너의 고운 핏방울이 하얀 눌길 위에

향긋한 쑥처럼 돋아날지 모르잖니

 

할아버지, 소년의 머리를 구슬을 빚어내듯

둥글게 둥글게 감겨줄 때 아이는 세숫대야에 머리를 묻고

엄마의 뱃속에서 아늑하고 포근한 양수를 유영하다, 이내 꿈을 꿉니다

 

비눗방울을 머금고 다시 태어난 아이 할아버질 보며 생긋 웃네요

 

 

 

 

 

 

 

[동상] 막차, 잠의 구간 / 이종숙

 

사내가 졸고 있다 핸들이 사내의 손아귀에서 풀려나간다 풀려나가는 속도가 점점 빨라진다 사내는 지구처럼 오래된 핸들을 굴려 예까지 오느라 지쳐있다 이마에 주름 길을 내며 사람들을 실어 날랐을 노역의 구간, 수백 마리의 잠떼들이 버스 안으로 몰려든다 잠떼들의 날개가 사내의 속눈썹에 엉겨붙는다 사내의 눈썹이 무겁게 내려앉는다 잠을 쫓아내느라 사내는 고개를 힘차게 흔든다 잠깐 동안, 사내에게 엉겨 붙었던 잠떼들이 파닥거리며 날아오른다 날아오르자마자 부메랑처럼 되돌아오는 날개들, 순식간에 의식을 쪼아 먹느라 사방이 조용해진다 차창 밖으로 잠 보다 깊게 박힌 벼들, 버스 안의 몇몇 승객들이 사내 보다 먼저 잠 속으로 침몰한다 사내의 버스는 포박당한 듯 잠 길을 운행하고 있다 천근 무게로 내려 앉는 사내의 속 눈썹 같은 달빛, 경계를 넘어 어둠 깊이 닿았던 사내의 핸들 안에 갇혀 나는 순식간에 포로가 된다 낯선 사내가 송두리째 내 인생을 몰고간다 깜박 잠 속으로 침몰할지 모르는 막차 안에서 사내보다 먼저 눈꺼풀이 내려앉는 아찔한 밤, 내 안에서 올라오는 달콤한 죽음의 냄새, 버스는 구간마다 잠들을 쏟아놓고 경계를 넘나들며 가속도를 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