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회 실천문학신인상 당선작 / 이정하
전화 결혼식 / 이정하
한국에 온지 4년째 되는 쁘띠와
다카의 신부 리나의
전화 결혼식이 열리는 날,
소주병에 눌어붙은 붉은 두꺼비마냥
가리봉 이주노동자들이 공단 쪽방에 모여 있다.
춥게 웅크린 저녁이 그들을 따 마시는 동안
한번 서로의 안주가 되어보지 못한
쁘띠와 리나가 전화선을 비집고 입장한다.
신부의 여린 숨결에도 찢기고 터진 등허리들은
기역니은으로 엎어져 아프다하는데
작업복으로 가만히 수화기를 감싸는 사내,
젖은 그림자가 바다를 건널까, 취하여 비틀대는 어둠들을 비끄러맨다.
마을 까지*의 설교소리가 전화선을 타고 스민다.
모자란 잠 때문에 맥없이 감겨오는
눈꺼풀들에서도 비가 서린다.
거, 요새는 전화로도 섹스를 한다는데, 이 참에
첫날밤도 전화로 세우지 그러나?
엷은 웃음들이 서로의 콧김에 바람을 불어넣으면
구공탄처럼 금세 뜨거워지는 두꺼비들.
비비기 전 갓 엎은 공깃밥처럼 리나의 꿈도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 이슬람 종교 지도자 직위 호칭.
엑스트라
- 만적의 난
나무깽이와 죽창을 틀어쥔 채
흡반같은 카메라 앞에서
만적의 난을 재현하는 새벽
자정부터 비는 추적추적 내리는데
태풍에 밭뙈기를 잃은 만적
불황에 일자리를 잃은 만적
경마에 처자식을 잃은 만적이가
씨벌헐 씨벌헐 무릎을 찧어가며
31시간 혁명을 일삼는 중이다.
왜 없는 놈들은 역사를 통틀어
엑스트라인가
쉴 새 없이 죽창을 휘두르며 나는
노비 혁명을 주도한 만적이가
최충헌의 家奴였다는 사실을 곱씹는다.
차별이 차별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혁명이 혁명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바람은 딴 데서 오지만
절망은 끝까지 그 자신을 반성해야 한다.
봉수대처럼 집채는 불 타 오르고
보조 출연자들은 똥돼지처럼 소리치는
반장의 악바리에 똥줄기가 빠지는데
그래도 살아야겠다고 우리들 만적들은
서로의 상처를 어깨동무로 싸맨 채
봉기의 창끝으로 冬天을 가른다.
엑스트라2
- 서대문 형무소에서
스탠바이, 감독의 지시에 400번대 죄수복을 입고 우리는 감방 안으로 들어선다. 버짐나무껍질처럼 하얗게 부스러진 형무소 내벽 페인트 찌끼들, 비스킷 자르듯 뚝뚝 쪼개며 우리들은 서로 손병희다, 이정재다, 흰소리를 한다. 이윽고 주인공이 시구문으로 끌려가면 우리들은 감방 문을 두들기며 환호작약한다. 그가 어디로 가는지 알 필요 없다. 우리가 원하는 건 환호하는 만큼의 아우성과 수당일 뿐.
캇, 스텝들이 옥사 밖으로 사라진다. 조명이 꺼지면 폐쇄된 우물처럼 젖어드는 고요.
문득 환호소리가 비명이 되어 나를 옥죈다. 마루에 주저앉자 비로소 손톱자국과 수십 년 묵은 먼지가 제 뼈를 드러낸다. 차마 알아볼 수조차 없게 흘려 쓴 글귀들 生生히 남아 압정처럼 고무신 신은 내 발을 찌른다. 용수를 쓴 채 이 곳을 지났을 사내들, 그들 역시 엑스트라에 불과했을까. 그들은 무엇을 위해 머리를 짓찧으며 죽어갔을까. 일당 삼만 칠천 원을 허리춤에 끼워 넣으며 나는 손바닥에 남아 있는 형무소의 뼛가루를 공원에 뿌린다.
행인 1, 2 무심히 홍예문을 지나면 용수를 벗어던진 패랭이꽃 하나,
祝文처럼 묵묵히 조명을 켠다.
두루마리
뒷간에 쭈그리고 앉아 두루마리를 뜯는다. 잠시 전에 내 몸이었던 것이 홀연히 떨어져 나와 두엄더미 위에 똬리를 틀고 있다. 한 점 한 점 두루마리의 살점을 뜯어 내 남은 몸을 닦는 동안 어느새 나와 두루마리는 한 몸이 되어 조심스레 풀어지기 시작한다. 가슴 속 한 잎 물방울 속 대롱 타고 쪼르르 내려와 기스락에 매달린다. 톡톡 새살 터지는 소리, 宇宙는 어디서부터 비워지는 것일까. 문틈 이마 위로 청솔모 한 마리 앞 이로 개암을 탁 터뜨리자 내 속이 환하게 열린다. 다 풀어낸 두루마리의 종이깍지처럼 몸속의 텅 빈 주름이 훤하다.
벽에서 배내똥 냄새가 하얗게 묻어난다.
탄피를 캐며
이 마을 사람들이 몰래 약초 캐러 사격장에 다녀간 사이, 사격 연습을 마친 우리들은 彈皮를 캐러 산에 들어갔습니다.
사람 손 밟은 풀들의 무릎이 흩뿌려져 있던 자리,
살아 움직이는 것은 인형의 머리를 뚫고 온 탄피의 뜨거운 살갗 뿐.
우리는 서로에게 묻힌 파편을 캐내며 보았습니다.
사격장 山으로 위장하고 있다는 사실,
밤에는 먹지로 자신을 칠하고 있다는 사실,
우리는 문득 서로의 검은 얼굴을 들어 맞은편에서 탄피를 캐고 있는 이들을 훔쳐보았습니다. 저들의 머리와 우리 머리와의 거리, 도저히 좁힐 수 없는 공간을 지뢰를 품은 풀들과 크레모아 앞에 선 산짐승들이 메우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서로 콜록이며 애써 기침을 나누었습니다. 스적스적 바람에 실리어 떠가는 풀빛… 우리는 무엇의 껍데기일까, 우리가 이제까지 뚫고 온 것은 무엇이었을까, 빈 탄창에 탄피를 채워 넣으며 우리는 쉴 새 없이 스스로를 불발시켰습니다.